중3 A(15)군은 최근 같은 학교 친구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퀵서비스 직원을 가장해 다른 사람의 체크카드를 받아오기만 하면 수십 만원을 벌 수 있는 ‘꿀알바(단기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하자는 것.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A군은 다른 중학교 동급생 두 명, 고1 선배 두 명과 함께 타인 명의 체크카드 14개를 받아 지정된 사람에게 전달했다. 이들로부터 체크카드를 건네 받은 이는 해당 카드들을 범행에 이용하려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조직원이었다. 결국 A군 등 중고등학생 5명은 보이스피싱 범죄 가담자가 돼 경찰 조사를 받았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손쉽게 돈을 벌려는 중고등학생까지 물들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사기 사건에 연루된 미성년자는 2011년 4,910명에서 2016년 7,435명으로 크게 늘었다. 과거 미성년자 사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인터넷 물품 사기와 더불어 보이스피싱 가담자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청소년들은 선배나 친구의 권유뿐 아니라 ‘단기 알바’ ‘고액 알바’ 등으로 꼬드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구인 게시물을 쉽게 접하고 보이스피싱에 뛰어든다. 이달 1일 서울 용산구에서 가짜 공문을 전달하고 피해자로부터 돈을 받으려다 붙잡힌 고3 B(18)군은 경찰 조사에서 “건당 40만원을 준다는 페이스북 광고를 보고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실제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오픈채팅 등에 ‘고액 알바’ ‘간단 알바’라고 검색하면 ‘남녀 모두 가능한 단기 아르바이트’ ‘일당 최하 50만원’ 등 업무 내용이 불분명한 구인 게시물 수십 개를 찾을 수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타인 명의 체크카드로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 돈을 뽑는 ‘인출책’, 또는 대포통장으로 이용할 체크카드를 받아오는 ‘수거책’ 등 간단한 범행을 주로 청소년에게 맡긴다. 더러는 금융당국 관계자를 사칭한 뒤 피해자를 만나 돈을 받아내는 ‘수금책’도 맡긴다. 서울에 사는 고1 C(16)양은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원 지시에 따라 피해자들에게 가짜 금융감독원 현금인수증을 제시하며 10회에 걸쳐 건네 받은 1억원 상당을 조직원에 전달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문제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부 청소년은 범행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 2일 피해자로부터 직접 현금 1,000만원을 받아 조직원에게 전달한 D(13)양은 “정보요원의 첩보작전을 돕는 일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서울경찰청은 21일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을 위한 안내문’을 서울시교육청에 보내 예방 교육을 당부했다. 관악구 소재 고교에 재학 중인 심모(17)군은 “종례시간에 중학생이 SNS에서 고액 알바를 구하려다 보이스피싱에 가담하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트위터에 검색을 해보니 고액 알바 구인글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김현걸 사이버보안협회장은 “구치소에 가면 수감자 상당수가 보이스피싱 가담자일 정도로 보이스피싱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 청소년들도 범행 타깃이 된 것”이라며 “미성년자라고 하더라도 범행 가담 정도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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