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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여막에 머문 다산, 반성과 다짐의 글 '여유당기'를 선친께 바치다

입력
2018.12.20 04:40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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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후회하는 마음의 집 

다산의 여유당 현판.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문구로 조심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 사후 은거하면서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훨씬 이전 천주교 문제로 노심초사한 아버지에게 올린 다짐의 문구로 보는 게 옳다.
다산의 여유당 현판.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문구로 조심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 사후 은거하면서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훨씬 이전 천주교 문제로 노심초사한 아버지에게 올린 다짐의 문구로 보는 게 옳다.

 ◇ 아버지께 바친 다짐 

부친의 여막(상주가 무덤을 지키기 위해 그 옆에 거처하는 초가)을 마재에 마련하면서 정약종을 제외한 약현, 약전, 약용 등 3형제는 이곳에 머물렀다. 높은 재주에도 평생 좌절과 비방이 따라다닌다는 마갈궁의 운명 탓이었을까? 다산이 막 다시 벼슬길에서 날개를 펴려던 즈음인 것이 안타까웠다. 다산은 늘 그랬다. 일이 풀릴만하면 꼭 마가 끼었다. 장례를 마친 뒤 5월말 졸곡제(卒哭祭)를 올릴 때까지 이들은 내내 마재에 있었다.

형제는 이 무렵 저마다 새롭게 당호를 지었다. 다산은 거처의 문미(門楣) 위에 여유당(與猶堂)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정약전은 매심재(每心齋)란 이름을, 큰 형 정약현은 망하루(望荷樓) 외에 수오재(守吾齋)란 이름을 거처에 내걸었다. 다산이 이 집에 대한 글을 지었다. ‘여유당기(與猶堂記)’와 ‘매심재기(每心齋記)’, 그리고 ‘수오재기(守吾齋記)’가 그것이다. 부친의 급작스런 죽음이 준 충격에 더해, 천주교 문제로 부친께 큰 근심을 안겨드린 것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이자 자기 다짐의 내용을 담았다.

다산은 언제 ‘여유당기’를 지었을까? 1800년 정조 서거 후 낙향했을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여유당기’에서 다산은 스스로를 이렇게 진단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용감하나 꾀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나 가릴 줄 모른다. 정에 맡겨 곧장 행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을 그만 둘 수 있는데도 진실로 마음이 기뻐 움직이면 그만 두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에 께름칙하여 불쾌한 것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만 두지 못한다. 이 때문에 어렸을 때는 방외를 내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서 돌아보지 않았다. 서른이 되어서는 지난날의 후회를 길이 진술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싫증냄 없이 선을 좋아하였지만 비방을 입음이 홀로 많았다.”

글에 기술된 마지막 나이가 30세다. 1792년 당시 다산은 31세였다. 또 뒷부분에 남을 논박하는 상소를 올리거나, 관직에 있으면서 공금을 농간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내용이 있으니, 1800년에 모든 희망을 접고 낙향한 뒤의 글이 아니다.

 ◇ 삼불(三不)의 서른 생애 

글에서 다산은 자신의 서른 생애를 10대의 불의(不疑)와 20대의 불고(不顧), 30세 이후의 불구(不懼)로 구분했다. 확신을 향해 의심하지 않았고, 과거시험 외에 돌아보지 않았으며, 후회할 일을 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썼다.

여기서 기왕의 후회를 깊이 진술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천주교 문제이다. 자신이 한 때 천주교를 믿었음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결과 낙선(樂善)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수 없는 비방을 많이 받았다. 이 같은 3단계에 대해 다산은 다른 글에서도 반복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여유(與猶)’는 노자(老子)의 ‘도덕경’ 15장에서 따온 말이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조심하고(與),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與兮若冬涉川 여혜약동섭천, 猶兮若畏四鄰 유혜약외사린).” 비방을 자초하지 않고 조심조심 살아가겠다고 했다. 다산이 초천에 돌아온 것은 부친상 당시인 1792년 5월과, 정조 서거 후인 1800년 여름 이후뿐이다. 그런데 병조참판 윤필병을 위해 써준 ‘무호암기(無號菴記)’에서 자신의 자호를 여유당거사라고 했다. 윤필병이 병조참판으로 있었을 때는 1796년 겨울이었다. 이때 이미 다산이 자신의 호를 여유당거사라 했으니, 다산이 ‘여유당기’를 지은 시점은 31세 때인 1792년이 맞다. “아버지! 많은 걱정을 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조심 또 조심하며 뉘우침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것이 ‘여유당기’에 담긴 다산의 다짐이었다.

 ◇ 나는 뉘우침이 많은 사람 

정약전은 부친상 당시 초천의 거처에 매심재(每心齋)란 당호를 달았다. 그리고는 동생 다산에게 ‘매심재기(每心齋記)’를 짓게 했다. 그 변은 이렇다. “매심(每心)이란 회(悔), 즉 뉘우침이다. 나는 뉘우침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매양 뉘우침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지녀 이로 인하여 재실에 이름을 지었다.(每心者悔也 매심자회야, 吾多悔者也 오다회자야. 吾每心不忘其悔者 오매심부망기회자, 因而名其齋 인이명기재.)” 매심 두 글자를 합치면 뉘우칠 회(悔)자가 된다. 언제나 뉘우치는 마음을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무엇을 뉘우치는가? 천주교에 빠져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을 뉘우친다는 뜻이다.

여유당 건물. 다산이 조심하겠다는 뜻으로 ‘여유당’을 골랐다면, 형 약전은 뉘우친다는 뜻으로 ‘매심재’를, 형 약현은 자신을 잘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수오재’를 택했다.
여유당 건물. 다산이 조심하겠다는 뜻으로 ‘여유당’을 골랐다면, 형 약전은 뉘우친다는 뜻으로 ‘매심재’를, 형 약현은 자신을 잘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수오재’를 택했다.

다산은 형님의 이 말을 받아 ‘매심재기’를 지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고, 잘못이 있다면 뉘우침이 없을 수 없다.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차이는 뉘우침의 유무가 가른다. 그리하여 잘못을 뉘우쳐서 성인이 된 여러 예를 들고 나서 이렇게 썼다.

“진실로 뉘우친다면 과실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 둘째 형님이 재실에 이름을 붙인 것이 어찌 그 뜻이 넓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뉘우침에도 도리가 있다. 만약 밥 한 그릇 먹을 사이에 불끈하여 흥분했다가 얼마 뒤에 뜬 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듯 한다면 어찌 뉘우침의 도리이겠는가? 작은 허물이 있게 되면 진실로 이를 고치고 나서 비록 잊어버려도 괜찮다. 큰 허물이 있게 되면 비록 고치고 나서도 하루라도 그 뉘우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워주는 것과 한 가지다. 똥은 썩고 더러운 것이지만 이것으로 북돋워 훌륭한 곡식이 된다. 뉘우침은 잘못과 허물에서 말미암지만, 이것으로 길러 덕성으로 삼으니 그 이치가 한 가지다.”

잘못을 해도 뉘우쳐 고치면 그 잘못이 나를 성장 발전시킨다. 똥이 더러워도 거름으로 주면 곡식이 그 기운을 받아 알곡을 맺는다. 지난 큰 잘못을 뉘우쳐 아버지의 뜻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다산은 글 끝에서 “나의 뉘우침은 둘째 형님에 견줘보면 1만배나 된다. 이것을 빌어다가 내 방의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썼다.

두 글 모두 상중에 초천에 돌아왔을 당시에 쓴 글이라 할 때, 세상을 뜬 부친에 대한 반성과 자기 다짐의 말로 읽지 않을 수 없다.

 ◇ 나를 지키는 집 

큰 형 정약현은 부친 서거 후에 망하정을 짓고 그곳에서 늘 하담 선영을 바라보며 슬퍼했다. 다산은 ’선백씨진사공묘지명(先伯氏進士公墓誌銘)’에서 형제 3인이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천주교 신앙 문제로 정약종이 죽고 자신과 정약전은 귀양간 일을 적었다. 또 열수의 여막에서 곡할 때마다 사람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하루는 큰 형님의 적삼 소매가 불그스레해서 보니 피눈물이더라고 썼다.

정약현은 자신의 거처에 수오재(守吾齋)란 이름을 지었다. 서두에서 다산은, 나와 굳게 맺어져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나인데,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한들 내가 대체 어디로 간다고 이런 이름을 붙이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썼다. 그러다가 1801년에 장기에 귀양 내려와 홀로 지내며 생각해 보니,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지킬 것이 없고,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하는 것인 줄을 새삼 깨달았다. 밭도 집도 누가 훔쳐갈 수가 없다. 정말 잘 달아나는 것은 바로 나다.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새 제멋대로 달아나 돌아다닌다. 천하에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나가 아닌가?

다산은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함부로 간수했다가 나를 잃은 자다. 어려서는 과거(科擧)의 이름을 좋아할 만하다고 보아, 가서 빠져든 것이 10년이었다. 마침내 돌이켜 조정의 행렬로 갔다. 갑자기 이를 위해 사모(紗帽)를 쓰고 비단 도포를 입고서 대낮에 큰 길 위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와 같이 한 것이 12년이다. 또 돌이켜 한강을 건너 조령을 넘어, 친척과 이별하고 분묘(墳墓)를 버린 채 곧장 아득한 바닷가의 대숲 가운데로 달려와서야 멈추었다.”

나를 함부로 간수했다가 마침내 나를 잃어버린 자라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어려서는 학문에, 자라서는 과거 공부와 천주교에 빠져서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다고 슬퍼했다. 둘째 형님도 ‘나’를 잃고 남해에 귀양 가 있는데, 큰 형님만은 자신을 잘 지켜 수오재 위에 단정히 앉아 계시니 그 본바탕을 잘 지켜서 잃지 않은 분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다산은 ‘수오재기’를 1801년 장기의 유배지에서 지었지만, 정약현이 자신의 재실에 수오재란 이름을 내건 것 또한 그 훨씬 전인 부친상 중의 일이었을 것으로 본다. 글 끝에 ‘아버님이 내게 태현(太玄)이란 자를 지어 주셔서 그것을 지키려는 의미’라고 한 정약현 본인의 말이 첨부되어 있어서다.

 ◇ 죽음 앞의 반성문 

세 아들은 저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반성문을 썼다. 다산이 지은 ‘여유당기’와 ‘매심재기’, 그리고 ‘수오당기’가 모두 부친 앞에 바친 뉘우침의 글이다. 조심하고 경계하겠습니다. 언제나 뉘우침을 간직하겠습니다. 저 자신의 본래 자리를 잘 지키겠습니다. 그 속에는 신앙의 갈등으로 부자의 연을 끊은 셋째 정약종에 대한 기억이 함께 묻어 있다.

천진암 성지내 천주교회 창립선조 가족 묘지. 오른쪽이 앞부터 조부 정지해, 부친 정재원, 형 정약전 등 다산 쪽 가족 묘이고, 왼쪽은 앞부터 부친 이보만, 동생 이격 등 이벽의 가족 묘다.
천진암 성지내 천주교회 창립선조 가족 묘지. 오른쪽이 앞부터 조부 정지해, 부친 정재원, 형 정약전 등 다산 쪽 가족 묘이고, 왼쪽은 앞부터 부친 이보만, 동생 이격 등 이벽의 가족 묘다.

정약현이 날마다 망하정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던 하담에는 이제 조부 정지해와 부친 정재원의 무덤이 없다. 하담에 있던 두 무덤은 1987년 경기 퇴촌 천진암 성지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가족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지해는 천주교와 아무 인연이 없었고, 정재원은 천주교를 끝까지 반대했다. 정약전 내외의 묘도 하담에서 옮겨왔다. 그 곁에는 아들 이벽의 신앙을 결사 반대하여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내 자식이 아니라며 감금하기까지 했던 이벽의 아버지 이보만(李溥萬)과, 형을 고발했던 이석(李晳)의 무덤, 정약현의 아내이자 이벽의 누이인 이씨의 무덤까지 옮겨져 있다.

정약종 아우구스띠노가 한국 천주교회 초대 명도회장으로 성인품에 오를 날이 머잖았지만, 그 선대의 누운 자리가 편치만은 않을듯하여 몇 차례 찾았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피치 못할 사정과 후손의 판단이 있었겠지만 지나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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