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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희생의 희생’에 대하여

입력
2018.12.27 04:40
수정
2018.12.28 15:2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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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생을 하고 ‘의미’를 얻는다. 독재에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아까운 청춘을 바친 사람은 ‘민주화 유공자’가 되고, 아들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가, 성탄절 즈음에 나타나 구세군 냄비에 1,000만 원을 투척하고 사라지는 익명의 독지가는 ‘기부 천사’가, 자살 폭탄 테러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무슬림은 ‘순교자’가 된다. 이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보통 사람은 얻지 못한 의미를 획득한다.

희생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 사람들은 의미를 훈장이나 무기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민주화 유공자는 옥살이 경력을 내세워 국회의원이나 장관 자리를 꿰차기도 하고, 장한 어머니는 아들의 배우자를 결정할 권리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슬라보예 지젝은 첫 번째 희생으로는 불충분하며 두 번째 희생, 즉 ‘희생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희생의 희생이란 희생을 통해 얻게 된 의미마저 희생하는 것이다. 민주화 투쟁으로 13년 2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고나서 환경운동가가 된 황대권과, 3년 6개월간의 감옥살이를 정치적 자산 삼아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던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동일한 희생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전혀 다르게 용해한 사례다.

텔레비전 사극에는 사약을 받는 사대부가 가끔 등장하는데, 의미에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죄인은 임금이 계신 도성을 향해 절을 하고 ‘전하, 성군이 되시옵소서’라고 충언한 후, 사약을 들이킨다. 나 같으면 ‘너나 처먹어’라며 사발을 패대기쳤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종아리를 맞아가며 경전을 익히고 성리학적 질서를 내화했던 사대부는 사약을 팽개치는 순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주체가 되는 것은 의미의 질서로부터 튕겨져 나와 똥(배설물)이 되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여태껏 내 삶을 지탱해 온 의미(지지대)를 무효화하는 일이다.

김춘수의 시 ‘꽃’은 의미예찬으로 가득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은 무의미에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 덧씌워진 의미가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예컨대 기부 천사라는 의미를 얻은 독지가는 자신의 호명에 부응하기 위해 매년 구세군 냄비를 찾아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수 있다. 또 초기 기독교인들은 순교자 되고자 사자밥이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

송상일은 ‘국가와 황홀’(문학과지성사, 2001)에서 ‘꽃’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해석과 달리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바로 그의 곁으로 달려간 꽃’을 웃음거리로 삼는다. 진정한 존재는 호명(부름) 밖에 있기 때문에 쉽사리 호명되지 않는다. 또 진정한 아름다움은 “뻔뻔스럽거나 되바라지지” 않으며, 동양의 아름다움은 “수줍음을 탄다.” 실제로 어떤 꽃 가운데는 건드리면 부끄러운 듯이 꽃봉오리를 움츠리는 꽃도 있다. 거기에 비해 김춘수의 꽃은 왠지 “인조꽃 같다”는 것이 송상일의 촌평이다. 말하자면 김춘수의 꽃은, “명월이” 하고 부르면 “예, 명월이 여기 있사와요”라고 냉큼 곁에 다가와 앉는 기생이나 같다.

주체는 기생(妓生)이 아니며, 주체가 관습적인 사회의 호명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의미에 기생(寄生)하기부터 그쳐야 한다. 국가나 사회는 우리를 호명할 때 ‘애국자’니 ‘효자ㆍ효녀’니 ‘산업 역군’이니 하는 식으로 의미를 담뿍 담아 부르며, 주위에는 국회의원ㆍ판사ㆍ장군ㆍ의사ㆍ사장ㆍ교수ㆍ시인 등등의 기표를 빼면 단숨에 시체가 되는 사람이 허다하다. 이들이야 말로 의미라는 지지대가 없으면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 기표에 현혹되어 자신과 멀어진 사람들이 아닌가. 그 어떤 희생도 숭앙하지 말자. 희생의 희생까지 가보자.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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