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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영남 유생 1만명 ‘사도세자 복수’ 상소… 시한폭탄이 터지다

입력
2018.12.27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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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안동 별시와 영남 만인소 

도산서원 건너편 시사단. 7,228명에 이르는 응시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별도의 들판에다 시험장을 만들었던 장소다. 문화재청 제공
도산서원 건너편 시사단. 7,228명에 이르는 응시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별도의 들판에다 시험장을 만들었던 장소다. 문화재청 제공

 ◇ 영남을 족쇄에서 풀다 

1792년 3월 25일, 도산서원 맞은편 낙동강 남안의 넓은 평지에 새벽부터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남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별시(別試)가 열리는 날이었다. 응시자가 7,228명에 제출된 답안지만 3,632장에 달했다. 구경꾼까지 한데 섞여 1만명이 넘는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1728년 이인좌와 정희량 등이 일으킨 무신란 이후 금지되었던 영남 유생의 과거 응시를 공식적으로 해제하는 대축제의 한 마당이었다.

1788년 이진동이 ‘무신창의록’을 들고 상경해 영남인의 억울함을 탄원하려다 곤경을 당해 죽을 뻔한 상황에서 1789년 8월 다산이 극적으로 그를 구출했던 일은 앞서 29화에서 살핀 바 있다. 1792년의 도산서원 별시는 그때 일의 후속 조치이기도 했지만, 바로 전 해인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신서파 남인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진 공격에서 정조가 자신의 우호 세력인 남인을 지켜내려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정조는 1792년 3월 3일 각신 이만수(李晩秀)에게 전교를 내렸다. 영남의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에 치제(致祭ㆍ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는 일)하고,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보이게 하라는 명이었다. 오늘날 도산서원에서 강 건너로 내려다보이는 시사단(試士壇)과 그 너머의 평지가 바로 시험장이었다. 이 시사단에 서 있는 비석은 영의정 채제공이 지었다. 그 비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양의 사학(邪學)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서울부터 퍼져나가 기호 지방까지 미쳤지만, 유독 영남의 70 고을만은 한 사람도 오염되지 않았다. 임금께서 탄복하시길 ‘이는 선정(先正)께서 남기신 교화 덕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교남빈흥록은 안동 별시에 대한 것으로 과거 시행 취지와 합격자 답안 등을 모아뒀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교남빈흥록은 안동 별시에 대한 것으로 과거 시행 취지와 합격자 답안 등을 모아뒀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천주교 신앙이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까지 퍼져 나라를 뒤흔들었지만 영남 쪽에서 천주교 신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퇴계 이황의 가르침에 따라 정학(正學)을 지켜왔기 때문이니, 이를 아름답게 여겨서 특별 시험을 이곳에서 실시한다는 취지였다. 천주교를 믿었던 기호 남인의 문제를 정학을 지켜온 영남 남인을 통해 희석시켜, 정권 우호 세력을 키우고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날 합격한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 등 합격자들의 답안은 모두 활자화 되어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이란 책자로 묶여 영남 전역에 배포되었다.

 ◇ 목멜까 두려워 밥을 안 먹습니까? 

십여 일 뒤 사월 초파일에 정조는 통금을 해제하고 도성의 백성들에게 연등 놀이를 즐기게 했다. 대동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4월 18일, 사간원 정언 유성한(柳星漢)이 상소를 올려 이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먼저 근자에 정조가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經筵)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는 혹시 별도로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신이 비록 그 까닭을 자세히 알지 못하오나, 또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이 있을까 염려합니다. 목이 멜까봐 밥을 먹지 않는 것은 전하의 거룩하신 지혜로 어찌 그리 해서는 안 됨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유성한은 신하들에게 뭔가 불편한 심기가 있어서 경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냐고 따졌다. 그것은 목이 멜까 겁이 나서 밥을 안 먹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도 했다. 그는 또 열흘 전 사월 초파일에 광대가 임금의 수레 앞으로 바싹 다가오고, 여악(女樂)이 난잡하게 대궐까지 들어간 일도 추궁했다.

글은 알게 모르게 사도세자 복권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다. 진산 사건의 거친 봉합과 영남 별시를 통해 남인들에게 문호를 열어 준 일 등에서 노론 벽파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서서히 죄어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느꼈다. 제동을 걸어야 할 시점이었고, 그 총대를 유성한이 매었다. 간언이라고는 해도 어조가 다소 과격했다.

 ◇ 네가 이미 알지 않느냐? 

정조는 꾹 참고 비답을 내렸다. 정조의 인내심은 이럴 때 더 무서웠다. “올린 글에 은미한 뜻이 있느냐고 했으니, 그렇다면 그 까닭을 틀림없이 속으로 알고 있을 듯하다. 어찌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이것 때문에 저것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재량한 것이 있다. 이밖에 아뢴 것은 말이 모두 마음속에서 나왔고, 글은 겉으로 꾸미지 않았다.” 겉으로는 칭찬했지만 불편한 심기가 묻어났다.

정조의 뜻은 이랬다. ‘내 은미한 뜻은 네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어쩌다 한번 백성들을 위해 즐거운 놀이판을 허락한 것을 두고 경연 문제와 연결 짓기까지 한 것은 대단히 우습다.’ 조정이 술렁거렸다.

돌아가는 여론이 심상치 않자 4월 27일 장령 유숙이 유성한의 상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척 하면서 엄호사격을 했다. 이틀 뒤 사간원 헌납 박서원(朴瑞源)이 글을 올려, 유성한의 말이 경망스럽고 음흉하며 지나치게 불측하다며, 어찌 신하가 임금에게 감히 미의(微意)니 폐식(廢食) 같은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느냐고 규탄했다. 더욱이 연등절의 여악이 대궐로 들어왔다는 것은 대궐문 건너편의 춘원(春苑)에서 장수들이 여악을 불러 논 것을 마치 대궐에서 그런 것처럼 악의로 왜곡해 팔방을 놀라게 했으니 삭탈관직뿐 아니라 의금부로 끌고 와 엄하게 국문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4월 30일, 침묵을 지키던 채제공이 마침내 글을 올렸다. 유성한 상소의 맥락을 살펴보면, 은미한 뜻을 말한 것은 임금을 범하려는 뜻이 있고, 목이 메일까봐 식사를 폐한다는 표현은 임금을 핍박하려 드는 흉악한 심보라고 썼다. 유성한을 은근히 보호하려 한 유숙까지 삭탈관직할 것까지 말했다. 좌의정의 말인지라 여파가 더 컸다.

 ◇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 

이후 상소문이 빗발치듯 일어나면서 유성한의 상소는 어느새 ‘성세(聖世)의 변괴(變怪)’, 즉 성대한 세상에 일어나서는 안 될 괴변이 되어 있었다. 호칭도 역적으로 바뀌었다. 삭탈관직 요구는 국문하여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외침으로 변했다. 윤4월 2일에는 성균관 유생 윤면순 등 400여명이 연명한 상소문이 올라왔다.

이 과정에서 대간 윤구종이 과거의 패역스런 언행과 함께 유성한의 일에 연좌되었다. 윤구종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인 혜릉(惠陵)을 지나면서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고 하며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는 유성한의 상소문이 불러온 파장이 끝 모르고 확대되어 가던 와중에 의금부에 끌려와 국문을 받고 윤 4월 15일에 급작스레 죽어버렸다.

윤 4월 19일 전 장령 이지영(李祉永)은 공공연하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전면에 내세워, 당시 옥사에서 의리를 명백히 하지 않고 은전을 베푼 결과 유성한이나 윤구종 같은 자들이 흉악한 짓을 기탄없이 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며 발언 수위를 한껏 올렸다. 조정의 논의는 어느덧 차마 말하지 못할 일, 즉 사도세자의 죽음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하는 단계로 경보가 격상되었다.

 ◇ 영남 유생 1만인의 2차에 걸친 연명상소 

윤 4월 27일, 마침내 영남유생 1만 57인이 연명한 이른바 영남만인소의 시한폭탄이 터졌다. 유성한의 상소는 영남 남인들이 오래 동안 가슴에 품고도 입을 열지 못했던 사도세자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제껏 이 문제는 입을 열기만 해도 역모로 몰리는 금기의 언어였다. 금기가 깨지자 말의 봇물이 터졌다.

영소전말(嶺疏顚末)은 상소문을 올리게 된 배경, 경과, 전말 등 영남만인소에 관련된 정보를 한데 모았다. 안동국학진흥원 제공
영소전말(嶺疏顚末)은 상소문을 올리게 된 배경, 경과, 전말 등 영남만인소에 관련된 정보를 한데 모았다. 안동국학진흥원 제공

만인소의 대표자는 이우(李堣ㆍ1739~1811)였다. “오호라! 신 등은 한 가지 의리를 가슴 속에 간직해온 것이 이미 30여 해입니다. 하지만 남에게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가슴만 치면서 다만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역적들을 다스리는 일은 하늘이 허락하고 신명이 살펴보는 바이니, 이들을 극형으로 처벌해야만 세상에 의리가 밝아질 것이라고 얘기했다.

글의 내용은 8일전 올라간 이지영의 상소문과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1만 57명의 참여자를 이끌어낸 것은 영남 남인들의 조직력의 승리였다. 불과 한 달 전 도산 별시를 통해 한껏 고양된 영남 남인들의 기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왕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에 더해, 좌의정 채제공과의 비밀스런 공조와 핫라인이 가동되고 있었다.

이우 등은 영남만인소를 들고 상경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수문장은 상소문의 수령을 거부했다. 전 수찬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여 영남만인소가 도처에서 저지당하는 상황을 폭로했다. 결국 왕명으로 그 상소가 임금 앞에 놓였다. 임금은 3년 전 이진동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두(疏頭)인 이우와 김희택 등을 어전으로 불렀다.

“내 앞에서 상소문을 읽거라.” 이우가 큰 소리로 상소문을 읽었다. 정조는 듣는 내내 감정이 복받쳐서 울음을 참느라 목이 꽉 메었다. 말을 하려 해도 입을 열 수 없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 감정을 추스른 임금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마음이 미어져서 말에 차서가 없다. 차마 문자로 기록하지 못해 대면해 얘기하려 했다. 네 어찌 너희들의 상소를 차마 듣겠느냐?” 한번 말문이 트이자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길고 자세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구체적인 조처를 요구하는 주장은 단호하게 막았다.

그러면서도 뜰에 있던 진신과 유생들을 전각 위로 올라오게 했다.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의 연교(筵敎)에서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쓸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과 어긋나지 않게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두어라.”

왕의 격렬한 슬픔에 감응해 영남유림은 열흘 뒤인 5월 7일에 다시 1만368명의 만인소를 작성해 다시 올렸다. 상소문과 1만명이 넘는 명단을 적은 종이는 길이만 90m가 넘었다. 하지만 끝내 처벌의 봉인은 열리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임금은 생각했다. 그 너머에서 화성 건설의 대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일이 벌어지던 당시 다산은 상중이었다. 급박하게 건너오는 소식에 귀만 세우고 있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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