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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상중에 밀명 받은 다산, 공학적이고 치밀하게 화성을 설계하다

입력
2019.01.03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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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탁월한 화성 건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화성전도'. 당시로는 엄청났던 이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정조는 정약용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화성전도'. 당시로는 엄청났던 이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정조는 정약용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그를 불러 성제(城制)를 올리게 하라 

영남만인소는 사도세자 서거 30주년을 맞아 의도적으로 기획된 남인들의 거사였다. 도산 별시 직후였고, 유성한의 상소가 불러온 파장도 있어서 타이밍이 절묘했다. 두 차례에 걸친 만인소로 사도세자 복권의 불씨가 당겨졌고, 신서파 남인을 겨냥했던 진산 사건의 여파도 이 일로 잠재울 수 있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전한 정조는 해마다 수원을 찾으면서 화성(華城) 신도시 건설을 위한 구상과 준비에 몰두했다. 그것은 원대한 꿈이었다. 화성 건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했다. 엄청난 소요 비용의 재원 마련과 신도시 건설 계획의 구체적 청사진이 필요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회갑이 되는 1795년에 신도시의 위용이 세상에 드러났으면 했다. 이래저래 마음이 급했다. 다산 외에 이 일을 맡길만한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기밀 유지를 위해서도 다산이 상중인 점은 퍽 유리했다. 정조는 다산에게 사람을 보내 그 신도시 건설의 청사진을 그려볼 것을 주문했다.

‘다산연보’ 중 1792년 4월 기사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5월에 충주에서 장례를 지내고, 마재로 돌아와 곡했다. 6월에 명례방으로 집을 옮겨 쉴 새 없이 왕래했다. 당시에 임금께서 물으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정조의 밀명을 받고 하는 수 없어 명례방에 새 거처를 마련해, 초하루와 보름 때 제사가 있을 때만 마재로 내려갔다. 명례방은 지금의 명동이다. 다산의 명례방 시절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또 ‘사암연보’는 1792년 겨울 기사에 “겨울에 명을 받들어 수원의 성제(城制)를 올렸다”고 썼다. 정조가 말했다. “1789년 겨울에 주교(舟橋)를 설치할 적에 정약용이 그 규제(規制)를 정리하고, 일을 맡아 이루었다. 그를 불러 자기 집에서 성제를 조목으로 만들어 올리게 하라.” 한강에 배다리 설치할 때 보여준 다산의 역량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공학적이고 꼼꼼한 설계 도면 

왕명에 따라 다산은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성룡의 ‘성설(城說)’에서 취할 만한 훌륭한 제도를 따와서 건물과 누대, 축성의 여러 제도를 정리해서 보고했다. 임금은 다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실린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보내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중가(起重架)의 설계를 명했다. 다산은 기중가는 물론, 공사에 필요한 유형거(游衡車) 등의 제작 도면을 제작 단가까지 적어 보고서를 올렸다.

1792년 6월부터 논의되어 이듬해인 1793년 4월에 올라간 다산의 보고서는 정조가 어째서 그토록 다산을 감싸고 돌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웅변해준다. 다산은 성 쌓는 데 살펴야 할 핵심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성설(城說)’을 썼고, ‘옹성도설(甕城圖說)’과 ‘포루도설(砲壘圖說)’로 세부의 제도를 논했다. 이어 ‘현안도설(懸眼圖說)’과 ‘누조도설(漏槽圖說)’의 장치를 설명한 뒤, ‘기중도설(起重圖說)’과 ‘총설’로 건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설비와 도구 문제로 마무리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성역의궤'의 영인본. 화성 설계, 건축의 모든 것이 다 담겼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성역의궤'의 영인본. 화성 설계, 건축의 모든 것이 다 담겼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그 공학적이고 유려한 설계는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제반 문제에 대한 꼼꼼하고 세심한 정리에 정조는 혀를 내둘렀다. 기중가와 녹로(轆轤), 유형거 등의 제반 장비는 물리적 계산식이 포함된 설계가 놀라웠다. 여기에 구리쇠로 만든 서양식 기아 장치를 조선식 도르레로 대체하거나, 조선의 굴곡 많은 도로 특성과 무거운 돌을 운반해야 하는 사정을 반영한 유형거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현장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의 선비가 감당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계별 사유와 합리적인 공정 

그 세부 내용의 설명은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니 이 짧은 글로 소화할 수 없다. 다산의 날렵하고 경쾌한 사유와 단계별로 사유한 공정체계의 합리성만 간략히 설명하겠다. ‘성설(城說)’에서는 먼저 8조목을 세웠다. 1. 푼수(分數). 2. 재료(材料). 3. 호참(壕塹). 4. 축기(築基). 5. 벌석(伐石). 6. 치도(治道). 7. 조거(造車). 8. 성제(城制)가 그것이다.

엄청난 역사(役事)여서 무엇보다 입안 단계의 계획부터 꼼꼼해야 한다. 1. 푼수에서는 성곽의 둘레를 먼저 재고 높이를 정해, 소용될 석재와 기술자 및 인부 인건비등 제반 비용의 산출 근거를 마련했다. 2. 재료는 벽돌이나 흙으로 쌓자는 주장을 배척하고 석성이라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3. 호참은 성을 쌓을 때 흙을 파서 생기는 호참 활용법과 도구에 대한 설명이다. 4. 축기는 바닥 다지기로, 엄청난 공사비가 드는 큰 돌이 아닌 개천의 자갈돌을 깔아, 임금을 지급하는 인부를 모집한다. 나아가 그들이 지고 온 양에 따라 공정하게 품삯을 지급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여기까지가 기본 인프라 구축에 관한 내용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앞의 녹로. 큰 돌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원화성박물관 앞의 녹로. 큰 돌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성을 쌓을 차례다. 5. 벌석은 석재 채취에 관한 내용이다. 돌덩이의 크기를 용도에 따라 표준화해서 자르고, 운반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6. 치도(治道)는 길 닦기에 관한 것이다. 평지가 드문 조선 지형의 특성상 채석장에서 성 쌓는 곳까지 평탄한 길을 먼저 확보하지 않으면 석재 운반이 어렵다. 7. 조거(造車)는 돌을 실어 나를 수레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위해 다산은 이전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유형거(游衡車)란 수레를 발명했고, 그 세부 도면과 치수까지 그림으로 그려 제시했다. 유형은 무게 중심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저울이다. 지면의 기울기에 따라 무게 중심을 잡아 돌 실은 수레의 수평을 잡아주는 장치다. 8. 성제는 무너지지 않게 성벽을 쌓는 원리를 설명했다. 배불뚝이가 아니라 3분의 2 지점까지는 들여쌓고, 그 위로는 내어쌓아 옆에서 보면 배가 들어간 모양이라야 하는 이유와 쌓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 밖에도 다산은 옹성(甕城)과 망루(望樓), 화재를 대비해 성문 위에 설치하는 물통인 누조(漏槽)에 대해서도 명나라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를 참고하여 구체적인 도면까지 그려 제시했다. 이 보고서로 화성 건설의 청사진이 눈앞에 보일 듯 펼쳐졌다.

 ◇놀라운 조선형 기중가의 탄생 

전체 총론에 해당하는 ‘성설’이 올라오자 정조가 입을 딱 벌렸다. “수고가 많았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옹성(甕城)ㆍ포루(砲樓)ㆍ현안(懸眼)ㆍ누조(漏槽) 등의 제도와 기중가(起重架)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 하라.” 서양인 테렌츠가 펴낸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이 참고도서로 함께 도착했다.

다산이 기중가를 만드는 과정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성은 돌로 쌓는다. 조선의 지형은 화강암이 많아 석재를 구하기는 힘들지 않다. 정작 비용은 벌석과 운반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기구의 사용이 요청된다.

수원화성박물관 앞에 설치된 기중가. 다산의 창의적 설계가 돋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원화성박물관 앞에 설치된 기중가. 다산의 창의적 설계가 돋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산은 먼저 뱃사람들이 무거운 돛을 올릴 때 쓰는 도르레식 활차(滑車)를 떠올렸다. 임금이 내려준 ‘기기도설’에는 11가지 다양한 형태의 기중가 그림이 실려 있었다. 이중 세 가지 도면을 확대해 그려 벽에 붙였다. 그나마 제8도가 가장 실상에 가까웠다. 이 기중가는 구리쇠로 주형을 부어 제작한 기아 장치 3개를 연동해 상단의 도르레로 동력을 전달하는 구조였다. 당시 조선의 기술력으로는 구리쇠 기아 장치의 제작이 불가능했다.

동력을 전달하는 기아 장치를 만들 수 없다면 기중가는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다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도르레 장치를 연동해 3중 기아 장치와 맞먹는 힘을 끌어낼 수는 없을까? 이렇게 해서 다산은 결국 10개의 도르레를 맞물려 동시에 구동시키는 전무후무한 조선형 기중가를 완성했다. 40근(약 24㎏)의 힘으로 2만 5,000근(약 1만5,000㎏)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놀라운 장치였다. 양 옆의 물레처럼 생긴 부분을 감기만 하면 연결된 도르레를 통해 동력이 차례로 전달되었다. 1,000명의 인부나 100마리의 소도 끌지 못할 무거운 돌도 두 사람이 물레 부분의 손잡이만 돌리면 새 깃털처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다산은 보고했다.

다산은 물리학적인 역학 계산까지 척척 해냈다. 한 번도 현장 경험이 없었던 그가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해치울 수 있었는지는 따로 연구가 필요하다.

 ◇단가를 낮춰 경비 절감 

그의 합리적 정신은 유형거 설계에서 한 번 더 빛났다. 수레 없이 석재 운반은 불가능하다. 큰 수레는 바퀴가 너무 높아 돌을 실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바퀴살이 돌의 하중을 못 견딘다. 또 경사면을 오르내릴 때 돌이 미끄러져 뒤에 있던 사람을 덮치거나, 반대로 수레를 끌던 소를 덮치는 문제도 있었다.

다산은 명나라 모원의가 지은 ‘무비지(武備志)’에 나오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비용절감형 바퀴 모델을 도입해 높이를 낮추면서 바퀴살의 하중을 분산시켰다. 또 하중을 견딜 수 있게 바퀴를 연결하는 중심축을 강화했다. 고정장치를 만들어 실은 석재가 앞뒤로 쏠리지 않게 했다. 여기에 중심을 잡아주는 반원형의 복토(伏兎) 장치를 두고, 수레 뒤쪽의 손잡이를 앞쪽보다 길게 달아 저울대처럼 수평 조정을 용이하게 했다. 돌을 실을 때도 뒤쪽 손잡이를 조금 들면 지렛대의 원리로 수레 위에 돌을 간단히 실을 수 있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 유형거. 무거운 돌을 나를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치밀한 설계가 적용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원화성박물관 앞 유형거. 무거운 돌을 나를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치밀한 설계가 적용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필자의 생각에 가장 놀라운 것은 제작 단가를 낮추기 위해 수레 각 부위의 목재를 다르게 구성한 것이다. 하중을 많이 받는 부위는 목질이 단단한 소나무를 썼고, 가로로 대는 나무는 참나무, 세로로 대는 나무는 생참나무를 써서 재목에 드는 비용을 최대한 절감했다. 그 결과 수레 한 대의 제작비는 12냥 내외였고, 전체 공정에 필요한 수레 70대를 만들어도 840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세부적인 칫수 뿐 아니라 작동 원리에 대한 설명, 심지어 합리적인 인건비 지급 방법까지 다산은 보고서에 세세하게 적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보고서가 올라오자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기뻐했다. 훗날 공사가 끝난 뒤에는 다산을 따로 불러 “고맙다. 네 덕분에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치하했다. 정조의 입장에서 다산은 충분히 지켜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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