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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농업史 통해 ‘내재적 발전론’ 싹 틔워... 근대사 역동성 발견

입력
2019.01.07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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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970년대에 정초한 ‘내재적 발전론’으로 '한국 사학계의 숨은 신'으로까지 불리는 김용섭 교수지만 연구 활동과 논문 발표 이외 대외 활동은 극력 회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이렇다 할 번듯한 사진이 없다. 이 사진도 수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답사 다닐 적에 찍어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선생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사진”이라며 건넸다. 김도형 이사장 제공
1970년대에 정초한 ‘내재적 발전론’으로 '한국 사학계의 숨은 신'으로까지 불리는 김용섭 교수지만 연구 활동과 논문 발표 이외 대외 활동은 극력 회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이렇다 할 번듯한 사진이 없다. 이 사진도 수제자인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답사 다닐 적에 찍어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선생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사진”이라며 건넸다. 김도형 이사장 제공

지성사의 관점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일제 식민 유산의 극복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제도적 차원뿐 아니라 정신적 영역에서도 우리나라를 식민화하려 했다. 36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광복 이후 우리 지식사회에 부여된 긴급한 과제 중 하나는 이런 정신적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었다. 이 과제에 가장 충실했던 이들은 역사학자들이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투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들로는 이기백, 김용섭, 강만길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용섭은 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식사회에선 그 영향력이 실로 컸던 역사학자다. 역사학자 윤해동은 김용섭을 한국사학의 ‘숨은 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 역시 광복 이후 학문적 진지함과 탁월성에서 김용섭이 최고의 학자라고 생각해 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김용섭은 농업사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서 최근에 이르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일관되고 포괄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둘째, 그의 분석이 중심을 이뤘던 ‘내재적 발전론’은 광복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이론이었다. 그는 자기 완결적 학문체계를 구축했던, 우리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던 지식인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논리와 구성 

김용섭은 1931년 강원 통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고려대에서 석사를, 연세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서울대 사범대에서, 1967년에서 1975년까지 서울대 문리대에서,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연세대 문과대학에서 가르쳤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지식사회 안에서 김용섭은 칼럼ㆍ에세이 등의 ‘잡문’을 쓰지 않는 학자로 유명하다. 그랬던 그가 2011년 자신의 회고록을 발표해 작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해방세대 학자의 역사연구 역사강의’가 그것이다. 회고록이란 형식을 통해 그는 더없이 치열했던 평생의 연구와 강의를 결산했다.

김용섭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 연구는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ㆍ2’다. 1970년과 1971년 두 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1995년 제1권 증보판이 나왔고, 2007년에는 제2권 신정증보판을 내놓았다. 그리고 1988년 조선시대의 농서와 농학을 다룬 ‘조선후기농학사연구’가 나왔고, 2009년 그 신정증보판이 출간됐다. 김용섭의 문제의식은 제1권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1970년 간행된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권. 이후 김용섭 교수는 농업사에 대한 묵직한 저작을 잇달아 내놓는다.
1970년 간행된 조선후기농업사연구 1권. 이후 김용섭 교수는 농업사에 대한 묵직한 저작을 잇달아 내놓는다.

“우선 필자의 관심거리가 된 것은, 우리나라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을 농업ㆍ농촌ㆍ농민에 관해서 그 내적 발전과정의 입장에서 해명할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였다. (...) 필자가 생각한 대로 이 시기의 농촌사회에서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이 밝혀진다면, 정체성 이론이나 타율성 이론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였다.”

‘조선후기농업사연구’를 꿰뚫고 있는 역사틀이, 김용섭 자신이 직접 사용한 말은 아니지만,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 아이디어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은 일제 강점기 백남운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잇닿아 있다. 그 논리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성장과 지주전호제의 성립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를 일궈냈다. 둘째, 중세사회를 해체하고 근대사회를 열고자 했던 자생적 자본주의와 아래로부터의 농민 저항은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억제되고 결국 식민지 수탈 체제가 확립됐다.

내재적 발전의 사례로 김용섭이 제시한 것이 ‘경영형 부농’이었다. 경영형 부농이란 차경지 경영을 통해 부농이 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볼 수 있는 ‘자본가적 차지농(借地農)’에 가까운 존재였다. 토지대장인 양안과 호적대장을 주요 분석 자료로 활용한 이러한 내재적 발전론이 준 충격은 지대했다. 우리 근대사의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경험적 비판 및 극복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 근대성의 기점을 조선 후기로 이끌어 올리게 했다.

김용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후 ‘한국근대농업사연구’(1975)를 바탕으로 ‘한국근대농업사연구 1’(1984), ‘한국근대농업사연구 2’(1984), ‘한국근대농업사연구 3’(2001)을 출간했고, 여기에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1992), ‘한국중세농업사연구’(2000)를 더했다. 총8권으로 이뤄진 ‘김용섭 저작집’을 통해 그는 조선 후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 농업사 연구를 완성했다. 실로 경이로운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성취와 기여 

김용섭 역사학의 전모를 여기서 모두 다루긴 어렵다. 나는 사회학적 시각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성취와 기여를 살펴보려 한다.

내재적 발전론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근대주의적 시각’과 ‘일국사적 시각’이다. 이 두 시각은 서로 결합돼 있다. 먼저, 내재적 발전론이 기반하는 근대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내재적 발전론은 전통사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생적 자본주의 발전의 가능성을 추적하고자 한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은 ‘심층적 실증’에 바탕해 조선 후기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역동성을 주목하고, 가치판단의 관점에선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암시적으로 옹호한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화 이론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에 가까운 것이며, 근대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비판적 근대주의’로 볼 수 있다.

비판적 근대주의로서의 내재적 발전론이 갖는 의미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동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일관된 분석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분석과 논리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적ㆍ경험적 무기를 제공했다.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비로소 우리 근대사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됐고, 또한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의 한국사적 특수성을 인식하게 됐다.

한편, 일국사적 시각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 탈민족주의론 등으로부터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 내재적 발전론은 이론적ㆍ경험적 수준에서 시험대 위에 올라서 있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그러나 내재적 발전론의 설명력은 여전히 높다. 무엇보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변동에서 중요한 것이 외적 충격에 대한 내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내적 변동이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에 대해 내재적 발전론은 일관된 설명을 제공한다.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어떻게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역사로 외화돼 왔는지에 대한 탐구는 김용섭이 후학들에게 던지는 과제인 셈이다.

 ◇지식인의 고독, 지식인의 사명 

마지막으로 김용섭에 대한 기억을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모교로 돌아와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연구실이 외솔관 5층에 있었는데, 김용섭의 연구실도 같은 층에 있었다. 몇 년 뒤 위당관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학자 그 자체였다.

김용섭 교수는 자신의 결벽증적인 고독에 대해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라는 책에서 “학문적 대의를 위해 보신의 지혜를 지키지 못했다”고 썼다. 연구가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식민사학 극복을 향해 돌진하면서 사학계 내부 문제를 건드린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용섭 교수는 자신의 결벽증적인 고독에 대해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라는 책에서 “학문적 대의를 위해 보신의 지혜를 지키지 못했다”고 썼다. 연구가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식민사학 극복을 향해 돌진하면서 사학계 내부 문제를 건드린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용섭은 일찍 학교에 나와 종일 쉼 없이 연구에 몰두하며, 식사도 싸온 도시락으로 대신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통찰적인 학자였는지는 그의 수제자들인 고 방기중 연세대 교수와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여러 번 듣곤 했다. 저녁 늦게 연희동 쪽으로 혼자 퇴근하는 그의 모습을 어쩌다 목격하면, 지식인의 고독과 사명을 생각하게 됐다.

김용섭의 학자적 모습은 자연 다산 정약용을 떠오르게 한다. 불우한 자신의 처지에 맞서 학문적 열정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처럼, 김용섭은 1960~80년대 군부권위주의 시대에 맞서서, 여전히 남아 있던 식민사학의 그늘에 맞서서 우리의 주체적인 역사 연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식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지식인에게 진리란 무엇이고,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이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ㆍ역사학ㆍ철학 등의 인문학이 진리 탐구에 주력한다면, 정치학ㆍ경제학ㆍ사회학 등의 사회과학은 정책 연구도 소홀히 할 순 없다.

진리 탐구와 정책 연구는 지식인에게 부여된 가장 중대한 사명일 것이다. 역사가 바뀌고 사회가 변화해도 지식인에게 부여된 이런 본래의 사명은 오랫동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임혁백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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