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부문 ‘킬링 이브’로 아시아계 첫 수상 영예
“미국에선 아시아계 여배우 수상, 흑인보다 어려워”
머리가 하얀 두 아시아인이 박수를 쳤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 중 남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에 오른 수상자의 시선은 두 노인에게 향했다. 수상자는 트로피를 들고선 “오 대디, 오 마이 갓”(오 아빠, 오 신이시여)을 외쳤다.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영어로 격하게 쏟아내던 수상자는 또렷한 한국어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한국계 캐나다 배우 샌드라 오(48)가 6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비버스힐스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시아계 배우가 이 부문 후보에 오르기는 샌드라 오가 사상 처음이며 수상도 최초다. 샌드라 오는 2006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시리즈 TV영화 부문에서 여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샌드라 오는 이날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공동 사회를 맡아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샌드라 오는 “솔직히 오늘 밤 이 무대 위에 서는 것이 두렵다”면서도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골든글로브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가 주최하는 시상식으로 영화와 드라마 부문에 걸쳐 한 해를 결산하는 할리우드의 권위 있는 행사 중 하나다. 영화 부문은 미국 최고 영화축제인 아카데미영화상의 전초전으로 여겨진다.
샌드라 오의 수상작은 BBC아메리카가 제작한 ‘킬링 이브’다. 샌드라 오는 암살범을 쫓는 영국 정보기관 MI6의 요원 이브를 연기했다. 빼어난 연기력으로 호평 받았다. 지난해 9월 열린 제70회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에 아시아계 최초로 후보에 올랐다. 수상이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영미권 언론이 꼽았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아시아계라서 수상자로 불리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샌드라 오의 이번 수상이 더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미국에서 아시아계 여배우가 주연을 맡고 상까지 받기는 흑인 혹은 라틴계 여성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며 “샌드라 오의 수상은 아시아계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구색 맞추기식 조연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라고 의미를 뒀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샌드라 오의 수상은 트럼프 정부의 ‘백인 포퓰리즘’에 대한 문화적 반작용”이라고 해석했다.
샌드라 오는 이민 2세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경제학자이고, 어머니는 생화학자다. 4세 때 발레를 배운 후 무대에 오르기를 즐겼다. 학교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하며 배우 꿈을 키웠다. 몬트리올영화학교를 졸업한 후 1994년 영화 ‘이중 행복’으로 첫 주연을 맡으며 재능을 나타냈다. 하지만 아시아계 배우가 설 자리는 좁았다. 그나마 주어지는 역할도 중국인 연기였다. 2005년 미국 인기 장수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한국계 미국인 의사를 맡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샌드라 오는 한국에서 생활한 적은 없지만 한국 혈통임을 종종 드러내왔다. 2008년 미국배우조합(SAG) 시상식 행사에 한복을 변형한 드레스를 입고 참석해 눈길을 모았다. 지난해 에미상 시상식 때는 어머니 전영남씨와 함께 입장했는데 전씨가 전통 한복을 입어 행사 최고 화제로 꼽히기도 했다.
한국을 강타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뜨거웠다.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라미 말렉) 등 2관왕을 차지했다. 말렉은 수상 소감에서 “누구보다 프레디 머큐리에 이 영광을 돌린다”고 말했다. 여우주연상은 '더 와이프'에서 노벨상 수상 작가의 아내로 열연한 배우 글렌 클로스에 돌아갔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 작품의 강세도 두드러졌다. 넷플릭스는 외국어 영화상('로마')과 감독상('로마'의 알폰소 쿠아론)등 영화와 TV 부문을 합해 5개 상을 휩쓸었다.
‘스타 이즈 본’에 출연한 팝가수 레이디 가가는 ‘쉘로우’로 주제가상을 받았다. 가가는 “음악계에서 여성이 뮤지션으로 인정 받기는 정말 어렵다”고 수상 소감을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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