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임혁백의 ‘비동시성의 동시성’
문학사든, 철학사든, 경제사든 이른바 통사를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통사를 기술하기 위해선 역사변동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탐구가 생산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이런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분석의 종합은 오랜 학문적 훈련과 통찰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00년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을 다룬 사회과학의 통사적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저작 하나를 들라면 나는 정치학자 임혁백의 ‘비동시성의 동시성’(2014)을 꼽고 싶다. 그동안 임혁백은 민주화 이행과 공고화, 민주주의ㆍ국가ㆍ시장의 관계, 민주주의ㆍ세계화ㆍ정보사회의 관계에 대한 탐구에서 탁월한 성과를 남겨 왔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이러한 자신의 연구를 결산한 저작이다.
임혁백의 정치학을 주목하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임혁백은 정치학자 최장집과 함께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이론가다. 둘째,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함께 광복 이후 한국 정치학을 대표하는 업적이다. 한국 민주주의론은 이 두 정치학자들에 의해 더욱 풍요로워지고 심화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 이론가 임혁백
임혁백은 1952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시카고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와 고려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쳤고,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와 광주과기원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그는 경제학자 김형기와 중도진보 싱크탱크 ‘좋은정책포럼’을 창립해 이끌었고, 세계정치학회(IPSA) 집행위원으로도 일했다.
우리 사회과학이 임혁백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민주주의 연구를 통해서였다. 임혁백은 전략 선택 이론에 입각해 한국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분석했다. 전략 선택 이론은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론의 틀에서 정치변동을 설명하려는 분석틀이다.
구체적으로 임혁백은 1987년 6월 항쟁과 그 결과인 민주화 이행의 특징을 지배 블럭 내 개혁파와 반대세력 내 온건파 간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에서 찾았다. 군부세력 안의 개혁파와 민주화운동 세력 안의 온건파가 주도해 6ㆍ29 선언을 이끌어냈다는 게 그 분석의 요체였다. 행위자의 선택을 중시한 이러한 연구는 참신한 시도였고, 이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이행 연구를 위시한 일련의 논문들을 묶어 임혁백은 ‘시장ㆍ국가ㆍ민주주의: 한국 민주화와 정치경제이론’(1995)을 내놓았다. 당시 이 저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 받았다. 첫째,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등한시돼온 시장과 국가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했다. 둘째, 민주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들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임혁백에게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중대한 과제는 불완전한 시장과 불완전한 국가를 개혁해 양자가 행복한 결합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에 있었다. 시장ㆍ국가ㆍ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묵직한 테제를 그는 우리 사회과학에 내놓은 셈이었다.
이후 임혁백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 그 결과가 ‘세계화 시대의 민주주의: 현상ㆍ이론ㆍ성찰’(2000), ‘신유목적 민주주의: 세계화ㆍIT 혁명 시대의 세계와 한국’(2009)이었다. 임혁백 민주주의론이 갖는 장점은 정부와 정당 등 정치사회 내부의 행위자들뿐 아니라 시장과 시민사회 등 정치사회 외부의 행위자들까지 주목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과 분석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정치적 사회과학자 임혁백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정치학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의 임혁백이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히 보여주는 저작이다.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850쪽이 넘는 대작이다. 이 저작으로 그는 201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사회과학부문)을 수상했다.
저작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이끄는 두 착상은 ‘긴 20세기’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긴 20세기’는 이탈리아의 역사사회학자 조반니 아리기로부터 빌려온 개념이다. 임혁백이 말하는 우리 사회의 ‘긴 20세기’는 1876년 개항에서 시작해 식민지, 분단, 정부 수립, 전쟁,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최근 세계화까지 이르는 현재진행형의 장구한 시간을 지칭한다.
이 ‘긴 20세기’를 분석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으로 임혁백이 주목한 것은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주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독일 바이마르 시대에 권위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 탈근대주의의 상이한 역사적 시간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했던 현상을 묘사하기 위한 개념이다.
임혁백은 이러한 블로흐 개념을 우리 사회 분석을 위해 재구성한다. 그가 재주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다중적 근대의 시간과 다양한 근대의 시간을 동시에 갖고 있고, 비동시적 시간의 동시적 ‘공존’뿐 아니라 ‘충돌’까지 포함하며, 경제와 정치의 균형적 시각을 중시하는 게 그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이론틀에 입각해 임혁백은 19세기 후반 개항에서 21세기 초반 세계화에 이르는 ‘긴 20세기’의 우리 역사 및 정치를 파노라마처럼 재현한다. 최장집이 적절히 지적하듯, 이 저작은 “거시역사적, 정치학적 퍼스펙티브를 통해 갈등과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근대화 과정을 면밀히 재점검하면서 근대화의 과제들을 어렵사리 성취해 가는 과정으로 분석한다.”
그렇다면 임혁백이 도달한 결론은 뭘까.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임혁백은 말한다.
“필자는 ‘긴 20세기’에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시간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비동시성의 동서성의 원인은 압축적 후발 산업화였다고 보았다. (...) 대한민국의 새천년 과제는 한편으로 전근대성을 탈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근대성을 완결하고 또한 탈근대에 진입해야 하는 3중적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3중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임혁백이 제시하는 것은 다원주의적 공존 및 균형을 추구하는 정치제도와 정치문화의 생산적 결합이다. 무엇보다 그는 비례대표제와 초다수제의 강화, 관용의 경계 확장과 극단주의의 배격, 사회적 합의기구의 활성화, 합의민주주의 모델로의 전환, 연방주의와 지방분권의 강화 등을 구체적인 제도의 디자인으로 제안한다.
저작 ‘비동시성의 동시성’에서 볼 수 있듯, 임혁백 정치학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넘어선 ‘정치적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다. 임혁백의 관심과 연구는 정치사회 내부동학은 물론 시장·시민사회와의 관계라는 외부동학에도 맞춰져 있다. 국가가 시장 및 시민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경험적 분석 없이 한국 정치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바로 이점에서 임혁백은 ‘정치적 사회과학’이란 새로운 학문적 영역을 개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비동시성의 미래
“모든 사람은 동일한 ‘현재’에 살고 있지 않다.” 블로흐가 남긴 말이다. 우리 사회에도 적절한 구절이다. 임혁백은 말한다.
“아직도 전근대에 살고 있는 노령 세대, 가난한 농민, 도시 빈민들, 꼴통 보수들이 있고, 근대 한복판에 살고 있는 부유한 신중산층, 대자본가, 노동계급, 그리고 근대에서 탈근대로 폭넓게 살고 있는 젊은 세대, 신유목 시민사회, 벤처사업가들, 지식노동자들 그리고 퇴영적 포스트 모던 진보주의자들이 비동시적 시간을 동시에 살고 있다.”
2014년 임혁백의 시선에 잡힌 우리 사회 현실은 2019년 현재에도 그대로 관찰된다. 앞서 지적했듯,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해 임혁백은 다원주의적 공존 및 균형을 강조한다. 하나의 시간으로 동시화하지 말고 여러 시간들을 사는 이들이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균형을 확보하도록 하는 다원주의적 해법은 타당하면서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미래 사회변동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앞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기존의 계급ㆍ이념 균열에 새로운 세대ㆍ젠더 균열이 더해지면서 사회갈등의 갈래가 중층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비동시적 시간들의 동시적 공존은 복합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미래의 시대는 다원주의적 상상력을 더욱 요청하고 있다. ‘닫힌 사회’가 아닌 ‘열린 사회’를 일궈나가야 하는 것은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데 매우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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