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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겉으론 배교했던 다산, 한양 파견 온 중국인 신부 몰래 피신시키다

입력
2019.01.17 04:40
수정
2019.01.22 17:15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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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한영익의 밀고

경기 이천 모가면의 어농성지에 있는 주문모(왼쪽) 신부의 동상과 윤유일의 동상. 주문모 신부는 1794년 의주 국경에서 윤유일과 지황을 만나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국경을 넘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경기 이천 모가면의 어농성지에 있는 주문모(왼쪽) 신부의 동상과 윤유일의 동상. 주문모 신부는 1794년 의주 국경에서 윤유일과 지황을 만나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국경을 넘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주문모 신부의 조선 파견과 입국

화성에서 신도시 건설의 망치 소리가 요란할 때, 조선 천주교회는 교회 재건을 위한 모색이 깊었다. 1790년 구베아 주교가 윤유일을 통해 조상 제사와 신주 설치를 금하는 사목교서를 보내오고, 그 여파로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초기 조선 교회의 지도층은 중심부가 크게 흔들렸다.

신부를 보내주겠다고 한 1790년 북경 구베아 주교의 약속은 이행되었다. 1791년 3월 마카오 교구 소속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가 20일을 걸어 의주 국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접선키로 한 조선인과 약속이 어긋나면서 레메디오스 신부의 입국은 실패로 끝났다. 조선 교회는 그 직후에 발생한 진산 사건에 이은 박해로 인해 이후 3년 간 북경에 사람을 보낼 수 없었다.

1793년 겨울에 마침내 조선 교회에서 파견한 지황(池璜) 사바와 예비신자 박요한 두 사람이 북경 성당을 찾아왔다. 주교는 이들에게서 지난 3년 동안 조선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 주교도 자신의 한 마디가 조선 교회에 얼마나 큰 충격과 파란을 일으켰는지 비로소 알았다. 지황 등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목이 잘렸을 때 흘린 피를 적신 수건 조각과 전후 정황을 기록한 편지를 구베아 주교에게 건넸다. 수많은 사람의 병을 치유했다는 기적의 수건이었다.

편지에서 조선 교회는 여전히 신부의 파송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레메디오스 신부는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에 구베아 주교는 북경 주교좌 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42세였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용모가 조선인과 비슷해 발각의 위험이 덜했고 한문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음력 11월 2일에 의주 국경에서 윤유일과 지황을 만나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국경을 넘었다. 12일을 꼬박 걸어 그들은 마침내 한양성에 당도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신부가 왔다는 소식이 은밀히 퍼지면서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술렁였다. 그들에게 주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기뻐 춤을 추며 천주의 은혜에 감사했다.

최인길에게 세례를 하는 주문모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최인길에게 세례를 하는 주문모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북촌에 마련한 계산동 천주당과 한영익의 밀고

최인길(嶊仁吉)과 지황, 그리고 윤유일 등은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러 가기 전에 계산동(桂山洞) 안쪽 으슥한 곳에 천주당을 마련했다. 밖에서 볼 때는 여염집과 다름이 없었지만, 내부는 북경에서 본 천주당의 모습을 그대로 따랐다. 도성의 한 복판, 그것도 임금이 거처하던 창덕궁의 담장에서 10여분 거리에 조선 최초의 교회당이 들어섰다. 계산동은 지금의 중앙고등학교와 현대 사옥이 있는 계동의 옛 이름이다. 그 위치 선정이 참으로 대담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말을 열심히 배우는 한편으로 지도부와 회동하며 교회의 확장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신자들은 한밤중에 은밀하게 모였다가 새벽에 조용히 흩어졌다. 구석진 외딴 집이었다. 부활절을 사흘 앞둔 성목요일에 감격적인 세례식이 열렸다. 이전에 가성직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도 다시 세례를 받겠다고 줄을 섰다. 고해성사도 행해졌다. 주문모는 한문으로 쓴 고백을 보고 이들의 죄를 사해주었다.

그렇게 다들 기쁨에 넘쳐 부활절을 맞았다. 음력으로 1795년 윤 2월 중순이었다. 이날 조선 최초의 정식 미사가 계산동 천주당에서 봉헌되었다. 전날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들이 이날 처음으로 성체를 영했다. 영과 육이 정결해지는 체험에 이들은 몸을 떨며 감동하고 찬미했다.

고양된 분위기 속에 다시 몇 달이 지났다. 하지만 이 같은 모임이 서울의 한복판, 그것도 궁궐의 지근거리에서 결코 오래 갈 수는 없었다. 1795년 5월 초, 주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은 여 교우 한 사람이 집에 가서 신자였던 자기 오빠에게 중국에서 신부가 건너온 사실과 강론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녀의 오빠 한영익(韓永益)은 진사시에 급제한 진사였다. 그는 앞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진산 사건 즈음에 배교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속여 신부를 만났다.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물으면서 그는 주 신부의 입국 경로를 자세히 캐물었다.

의심 없이 전해준 이야기를 들은 그는 곧바로 서학을 격렬히 미워하는 이벽의 동생 이석(李皙)을 찾아가 주문모의 입국 사실을 알렸다. 당시 이석은 국왕의 친위조직인 별군직(別軍職)에 있었다. 한영익은 이석에게 주문모가 머물던 계산동 거처의 위치와 그의 생김새, 입국 방법까지 자세히 일러주었다. 깜짝 놀란 이석이 즉각 채제공에게 이 사실을 다급하게 보고했다. 이날은 5월 11일이었다.

◇주 신부를 피신시킨 다산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이를 알고 이석(李晳)에게 고하였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 이석이 채제공에게 고하니, 공은 비밀리에 임금께 보고하고,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에게 명하여 이들을 잡아오게 했다.”

하지만 조규진이 포졸을 풀어 천주당을 덮쳤을 때 주문모는 이미 다른 곳에 피신한 뒤였다. 그들은 포도청의 급습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한영익의 밀고와 이석에 이은 채제공의 보고는 거의 동시에 긴박하게 이루어졌다. 한영익은 밀고자이고, 이석은 보고자이니 이 사실은 천주교 쪽에서 미리 알아 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위 글에서 다산은 ‘용역문지(鏞亦聞之)’라고 썼다. 한영익이 이석에게 고발하는 내용을 자신도 같은 자리에서 함께 들었다는 말이다. 이석은 다산의 큰 형님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화급한 상황에서 교회 측에 주 신부를 빨리 피신시키라고 알려준 것은 정황상 다산일 수밖에 없다.

1797년 8월 15일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의 대리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다시 이때의 정황이 나온다.

“이 일이 터진 것은 6월 27일(음력 5월 1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신부님께 고해성사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이 무관에게 신부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또 다른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는,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신부님한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했던, 고발 현장에 있었던 무관은 다름 아닌 다산이었다. 당시 다산은 우부승지로 있다가 체직되어 부사직(副司直)의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를 교서하던 중이었다. 부사직은 오위(五衛)의 무직(武職)이었다. 다산은 계산동에 있다는 중국인 신부의 위험에 처한 것을 알자, 그 길로 한영익이 알려준 장소로 달려가 신부의 피신을 권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서 주문모 신부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다산의 ‘자찬묘지명’과 구베아 주교의 편지의 기록을 겹쳐 읽으면 당시 다산의 역할과 행동이 드러난다. 이것이 다산이 지속적으로 외배내신(外背內信), 겉으로는 배교했지만 속으로는 믿었다는 논의 속에 있는 이유였다.

◇최인길의 대역 행세와 3인의 순교

급박한 소식에 최인길은 크게 놀랐다. 다산이 주문모 신부를 데리고 서둘러 나간 뒤, 최인길은 달아나지 않고 계산동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말을 할 줄 알았다. 그는 상투를 잘라 중국 사람처럼 꾸몄다. 주문모 신부를 붙들기 위한 체포조가 최인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최인길은 시간을 벌기 위해, 역관 집안의 훈련된 중국어를 섞어가며 자신이 바로 중국인 신부 주문모라고 얘기했다. 그는 일부러 시간을 자꾸 끌었다.

나졸들이 그를 체포해서 압송한 뒤에야 그들은 최인길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영익의 밀고에 따르면 주문모는 수염이 길었는데 최인길은 수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인길의 가짜 주문모 행세는 바로 들통이 났다. 이후 기찰포교들이 쫙 깔려서 주문모 체포에 다시 나섰지만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신 윤유일과 지황이 잇따라 체포되어 끌려왔다.

붙들려온 세 사람은 그날 밤 의금부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심문관은 세 사람에게서 원하는 진술을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곤장을 치고 주리를 틀어도 그들은 끝까지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하지만 주문모의 입국 경로와 생김새를 물으면 그들은 갑자기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었다. 고문의 강도가 점점 세져 학춤(죄인의 팔을 뒤로 꺾어 엇갈려 묶고 공중에 달아 채찍질하는 형벌) 같은 극악한 고문까지 동원했어도 그들은 예수 마리아의 이름만 불렀다.

이튿날 새벽 세 사람은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숨졌다. 끌려온 지 12시간도 못 된 시점이었다. 최인길이 31세, 지황은 29세, 윤유일은 36세였다. 통상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인 신부를 잡아야 하는데, 그에 관해 증언해 줄 가장 중요한 증인 세 사람이 검거와 동시에 죽은 것이다. 이들에게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했다기보다, 이들의 입을 막으려고 죽여 버린 것에 더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6월 18일로 한 달 뒤였고, 화성 건설은 한참 궤도에 올라 속속 건물이 낙성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조정이 다시 천주교의 격랑 속에 빠져 드는 것은 국왕 정조도 우의정 채제공도 원치 않았다. 일이 확대되는 것을 원천 차단하려 한 고육책의 느낌이 짙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천주교 문제가 터지면, 불이 어디까지 번질지 알기조차 힘들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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