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땅
여기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530여년 전 경기 광주군 언주면의 마을에 뿌리 내렸다는 은행나무. 문헌에는 이 나무에 얽힌 전설이 나옵니다. 어느 날 마을에 온 한 스님이 “이 마을은 부자 마을이 될 수도 없고, 명당도 없다”는 저주 같은 말을 했다고 하죠. 그러나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만큼은 명당이라며, 지팡이를 꽂았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라날 은행나무를 정성껏 보살피면 번창할 것이라고 예언을 남깁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스님이라지만 마을사람들로서는 그냥 듣고 흘려버릴 수 없었을 겁니다. 경기 성남시를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 탄천과 과천시 관악산에서 시작된 양재천이 합류했던 곳에 자리한 이 마을은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대표적인 한강지류의 주변 저습지로, 강물의 범람이 잦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비옥한 땅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 가난의 상징, 보리를 경작한다는 이유로 시집 가기조차 꺼렸다는 마을. 광복 후에도 한참이나 지나 전기가 보급됐다는 이 곳. 동네 한 편에 야트막하게 서 있었던 언덕의 이름마저 ‘쪽박 산’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묵묵히 예언을 따르기라도 하듯 해마다 날을 잡아 은행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백성의 삶과 왕조가 요동치기를 반복하며 수백년이 흐른 지금, 마을은 변했습니다.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 동네는 아니지만 가장 많은 부자가 ‘재생산’ 된다고 전해지는 곳. 그 옛날 지도에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동네 이름까지 기억하는 곳. 오늘도 남보다 앞서가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아이들의 유년이 ‘제물’로 바쳐지는 곳.
배타적 욕망이 쌓아 올린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 존재하는 이 곳의 오늘날 주소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입니다. 예언때문이었을까요. 대치동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가라, 강남으로
1970년대, 정부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이 넘도록 한강 이북의 좁은 땅에서만 인구가 늘어났던 한양, 서울에 더 이상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남에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하고 아파트 붐을 주도했지만 강북 ‘양반동네’를 선호했던 고위층 인사들은 물론 상당수 시민들은 생경한 ‘촌동네’로의 이주를 꺼렸습니다.
그러다 박정희 정부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내 놓죠. 근대화를 지휘하는 정권이라면 그 누가 대통령이라도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였지만, 그 해법은 정권의 컬러처럼 군사작전 같았습니다. 바로 강북 명문고의 강남 강제 이주였습니다. 종로구 등지에 있던 공립학교뿐 아니라 휘문고 같은 사립학교까지 이전시킵니다. 정부가 학교 재단 소유 부지의 땅값을 인위적으로 폭락시키는 등 외압을 행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휘문고를 비롯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경기고 등 7개 안팎의 강북 명문고들이 대치동과 삼성동 등 강남 일대로 이사를 합니다.
효과는 놀라웠습니다. 이주 초반 상당수 고등학생과 그 가족들은 이사 대신 장거리 통학을 선택하지만 변화는 아래 단계에서 진행됐습니다. 이들 명문고에 자녀가 배치 받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열망으로 강남 초ㆍ중등학교의 학생수와 전입 인구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는 고위 공무원의 인사 청문회에서 단골 소재가 돼버린 위장 전입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구분 지었던 8학군은 원래 강북의 종로구와 서대문구였지만, 이름마저 학교들과 함께 옮겨오면서 ‘강남 8학군’이 탄생합니다.
정부가 의도한 것으로 보긴 어렵지만 강남이 ‘교육의 중심지’라는 타이틀을 얻는 데 필요했던 다음 요건은 1992년부터 본격화된 사교육 합법화였습니다. 기존에 재수생 등 일부에게만 허용됐던 학원의 문이 재학생들에게도 열린 것이죠. 강남 거주와 제도의 완화. 이로써 강남 사교육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이 탄생하기까지는 다른 결정적인 요소가 더 필요했습니다. 공급과 수요, 그리고 대입제도라는 ‘트라이앵글’입니다.
조원일 기자 ㆍ김창선 PD ㆍ자료조사 박서영 ㆍ이현경ㆍ박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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