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주부 최모(35)씨는 최근 여섯 살 딸 손에 이끌려 대형 쇼핑몰 안 화장품 매장에 들렀다. 이웃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이용 화장품 놀이를 하고 돌아온 딸이 화장품을 사달라고 조른 것. 어르고 달래서 그나마 피부에 안전하다 싶은 간단한 제품을 골랐지만, 그래도 찝찝함은 남아 있다.
최씨는 “중ㆍ고등학생 때쯤 되면 화장 문제로 아이와 싸운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때쯤 가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화장을 시켜달라고 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키지 않는다”라면서 “엄마의 입장에선 당연히 싫지만, 친구들과 함께 노는데 우리 애만 못 하게 할 수는 없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여자 아이들의 화장 붐이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넘어 미취학 아동들에게까지 번져가고 있다. 외모 지상주의 타파를 내걸고 한쪽에선 ‘탈 코르셋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정작 다른 쪽에선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아이들까지 화장부터 배우고 있는 셈이다.
22일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를 보면 ‘아동용 화장품’이라는 명목으로 판매되는 상품은 4만4,600여건에 이른다. 엄마처럼, 언니처럼 화장해보라는 유혹이 넘실댄다. 한 온라인 오픈 마켓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수치는 나오지 않았으나 어린이용 화장품 판매액이 2018년 기준, 전년 대비 약 4.5배 성장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 화장 유행은 유튜브만 봐도 확연하다. 구독자가 186만 명에 달하는 한 어린이 유튜버가 공개한 ‘엄마처럼 화장하고 싶어요’ 영상은 조회수가 430만 건에 육박한다. 인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출연해서 어린이용 화장품을 권유하는가 하면, 어머니와 아이가 메이크업 대결을 펼치는 콘텐츠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 화장에 대한 비판은 강하게 제기된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화장을 하게 되면 여자 아이들은 그 순간부터 화장이 지워지거나 번지는 것을 피하려고 야외 활동 등 다른 활동을 피하려 든다”면서 “단순히 외모 지상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잠재력이나 꿈의 크기마저도 좁혀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심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부모들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화장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수단이 된 상황에서 무작정 아이들 요구를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5살 딸을 둔 직장인 김모(32)씨는 “좋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니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에는 자녀 키우는 입장에서는 힘든 면이 있다”고 말했다.
부모들 경쟁심은 ‘적극적 방관’으로도 이어진다. 4살 딸을 둔 황현아(29)씨는 “동네 엄마들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장난감 얘기도 나오기 마련”이라면서 “다른 집은 해줬는데 나만 안 해주면 나나 아이가 뒤처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끔이라도 경험시켜주려고 사주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끼리의 놀이가 사실상 엄마 아빠들의 경쟁이 되어버린 셈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모와 소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과도한 상품화가 금기의 영역을 넘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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