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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의 세심한 맛] 스테이크ㆍ딸기에 솔솔… 음식을 찰나에 바꾸는 ‘후추라는 마법’

입력
2019.01.25 16:00
수정
2019.08.09 18:5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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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싸한 맛 외에도 다양한 표정… 활용 따라서 양념 이상 역할

모든 스테이크에 후추는 필수지만 양념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통후추를 빻아 안심 위에 뿌리고 요리용 실로 꽁꽁 묶어 팬에 구워주면 후추 스테이크가 완성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스테이크에 후추는 필수지만 양념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통후추를 빻아 안심 위에 뿌리고 요리용 실로 꽁꽁 묶어 팬에 구워주면 후추 스테이크가 완성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일요일 저녁에 떡국을 끓여 먹었다. 경기 안성시 고합면에서 우려냈다는 사골국물(첨가물이 안 들어 있는)에 냉동실에 있던, 썬 가래떡과 살치살 몇 점을 더해 푹 끓이고 계란 한 알을 풀었다. 마무리로 통후추를 갈아 뿌렸는데 향을 맡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명절, 특히 설이면 상에 올랐던 쇠고기 뭇국이었다. 양지머리 국물에 다시마, 때로는 두부도 들어간 국으로 추석에는 무 대신 토란을 썼다. 고소하면서도 단내를 풍기며 끝에는 무의 신맛이 감도는 국물 위에 후추를 솔솔 뿌리면 알싸함과 매캐함이 퍼지면서 화룡점정, 음식이 완성되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왜 떡국을 끓여 놓고는 엉뚱하게 쇠고기 뭇국을 떠올리는가? 잘 모르겠다. 명절마다 상에 올랐으니 떡국보다 많이 먹었고, 후추도 더 잘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닐까. 어린 시절 내내 후추는 직육면체의 양철통에 담긴 고운 가루였다. 한동안 빨간색과 흰색이던 통(제조사 맥코믹)의 색깔은 언젠가부터 노랑, 검정, 흰색(제조사 오뚜기)으로 바뀌었다. 마법까지는 아니지만 후추는 음식의 표정을 찰나에 극적으로 바꿔주는 힘을 지녔노라고 언제나 믿어왔다. 

세월이 흘러 1999년, 한층 업그레이드된 후추를 만났다. ‘후추 좀 갈아 드릴까요?’ 당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점원이 허니 머스터드 드레싱을 끼얹은 만다린 치킨 샐러드를 가져온다. 접시를 식탁에 올리고, 요청을 받으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기다란 나무통을 돌려 통후추를 즉석에서 갈아준다. 어디에선가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후추의 향이 식탁에 피어오른다. 양철통에 담긴 가루가 품고 있던 알싸함과 매캐함 외에도 달콤함 등 가늘고 섬세한 향이 가닥가닥 함께 딸려 나온다. 쇠고기 뭇국을 완성시켜 주는 후춧가루의 표정도 놀라웠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구나. 후추는 좀 더 다양한 표정의 향신료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통후추 향 살리는 후추갈이

또 20년이 흘러 2019년 1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숙원이었던 후추통 교체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이케아의 후추갈이를 써 왔는데 일단 병의 직경이 너무 두꺼워 돌리기 위해 손에 쥐면 다소 불편했다. 게다가 뚜껑의 갈이도 내구성이 썩 좋지는 않아 점차 잘 안 갈린다. 후추갈이의 ‘날’은 칼날과 사뭇 다르다. 커피 그라인더와 비슷하게 원뿔형에 나선으로 이가 난 ‘버(burr)’를 쓴다. 알고 보면 맷돌과도 비슷한 원리로, 통후추를 갈지 않고 부숴 알갱이 내부의 향 화합물을 더 잘 뽑아내 준다. 갓 갈아낸 신선함도 그렇지만, 다소 불규칙하게 부숴내기 때문에 후추의 향이 한결 더 도드라진다. 

일본에 출장을 갈 때마다 백화점 상층부에 들러 조리도구를 샅샅이 살펴보고 한두 가지씩 사온다. 이번에는 국자와 후추, 간장, 기름병 일습 등을 들고 왔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이제 명맥만 조금 남은 채 사라져 버렸지만 후추의 업그레이드는 한 구석의 예외만 빼놓고는 완전히 정착했다. 가장 간단하게는 마트에서 일체형을 사는 것만으로도 갓 갈아낸 후추의 향을 즐길 수 있다. 유리병에 후추가 담기고 뚜껑이 곧 갈이인 제품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구성이 약할뿐더러 갈아내는 굵기의 조정도 불가능해서 정말 간단한 해법을 찾을 때에만 권한다. 

후추갈이를 고를 때는 원뿔형에 나선으로 이가 난 ‘버’가 튼튼한 것으로 고르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후추갈이를 고를 때는 원뿔형에 나선으로 이가 난 ‘버’가 튼튼한 것으로 고르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렇지 않고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통후추와 갈이를 따로 사서 쓰는 게 좋다. 심지어 건전지로 작동하는 제품이 나온 지도 오래되었다. 한 손으로 들고 스위치만 누르면 후추가 갈려 나와 편한데다가 조리하는 과정에서 식재료(특히 닭고기)를 다룬 손으로 만져 벌어질 수 있는 교차 감염의 위험도 줄여준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다면 갈이의 몸통이 내 손에 맞고 잘 미끄러지지 않으며(후추를 끓는 음식물 위에 갈아 내다가 미끄러져 떨어트리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버가 잘 버텨주는 제품을 고른다.  

손 크게 요리를 하는 경우라면 준비 과정에서 쓸 만큼을 미리 갈아 두는 것도 효율적이다. 작은 종지 등에 담아서 소금처럼 손으로 솔솔 뿌리는 것이다. 다만 향 화합물은 휘발성이 강해 금세 날아가 버리므로 최대한 늦게 갈 것을 권한다. 이처럼 향 화합물이 금방 휘발하므로 더 이상 양철통의 가루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는데, 하필이면 위에서 언급한 ‘후추의 업그레이드가 예외인 구석’이 한식의 세계라 늘 마음에 걸린다. 저렴한 가격대의 밥집이라면 그렇겠지만 고급 음식점도 다르지 않다. 참고로 ‘향신료는 쓸 때마다 신선하게 갈아내는 것이다. 갈아서 파는 제품은 조금만 둬도 톱밥이 되어 버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 와서 따져보면 어린 시절 쇠고기 뭇국의 후추는 가장 독한, 그래서 생명력이 강한 향 몇 가지만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한식의 세계는 아직도 똑같은 알싸함과 매캐함만을 고수하고 있다. 

식감을 살리면서 풍미를 돋우는 후추 스테이크를 만들 때는 굵게 빻은 후추를 스테이크 주위에 넉넉하게 둘러 구워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식감을 살리면서 풍미를 돋우는 후추 스테이크를 만들 때는 굵게 빻은 후추를 스테이크 주위에 넉넉하게 둘러 구워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후추 껍데기 입힌 스테이크

‘다들 거슬릴 지경으로 후추를 너무 많이 쓴다고 생각한다. 소금은 재료에 녹아들지만 후추는 그렇지 않다.’ 미국의 거장 셰프 토마스 켈러가 ‘프렌치 런드리 요리책’에서 밝힌 후추의 철학이다. 고기라면 후추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생선은 아닐 수도 있고, 특히 흰살생선이라면 눈에 띄지 않는 백후추도 있으니 습관적으로 흑후추를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애초에 별로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적어도 고기에는 흑후추를 마음 놓고 써도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고기를 굽자.

모든 스테이크에 후추가 필수라지만 흔히 생각하는 양념이상의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다. 바로 후추 스테이크(Steak au Poivre)이다. 여느 고기 요리처럼 갈아 솔솔 뿌리는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고, 굵게 빻아 껍데기(크러스트)가 되도록 넉넉하게 둘러줘야 이름이 산다. 웬만한 스테이크 부위로 얼마든지 만들어 구워 먹을 수 있지만 대체로 후추 스테이크에는 안심을 쓴다. 이유가 뭘까? 소의 안심(사실은 돼지도 마찬가지)은 등심에 둘러싸인 원통형의 근육으로 운동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굉장히 부드러운 대신 맛은 밍밍하다. 쇠고기의 맛이 밍밍하다니 좀 어색하지만 등심, 채끝 등 다른 부위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후추는 이 밍밍함의 공백을 메워주는 한편, 안심 특유의 부드러움과 질감의 대조도 이룬다. 

후추갈이에 대해 살펴 보았지만 정작 후추 스테이크에는 통후추를 직접 빻아서 쓴다. 굵고 불규칙하게 부숴진 알갱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고기부터. 부드러운 만큼이나 굽는 과정에서 모양이 틀어지거나 너무 익어 뻣뻣해질 수 있으므로 안심은 적절한 높이(2.5㎝ 안팎)를 갖춰 준비해 가운데를 요리용 실로 묶어 준다. 안심을 갖춘 정육 코너라면 이미 묶은 채로 팔기도 하고, 요청에 따라 해 줄 수 있으니 일단 물어본다. 안 해주는데 요리용 실도 없다면? 비상용 반짇고리의 실이라도 몇 가닥 꼬아서 묶으면 안 묶는 것보다 훨씬 낫다. 운동복 바지의 허리끈을 당겨 맨다는 느낌으로, 조금 당긴다 싶지만 안심의 허리가 잘록해지면서 숨을 못 쉴 정도로 꽉 묶지는 않는다. 

후추 스테이크를 만들 때는 후추를 갈지 않고 불균등하게 빻아서 써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후추 스테이크를 만들 때는 후추를 갈지 않고 불균등하게 빻아서 써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고기가 준비되었다면 후추를 빻는다. 2.5㎝의 안심 두 쪽이라면 통후추를 네 작은술 준비해 마른 종이행주나 제과제빵용 유산지 위에 올리고 편하게 다룰 수 있는 팬이나 냄비를 꺼낸다. 오른손잡이라면 오른다리를 싱크대에 기댄 뒤 발을 살짝 들어 온 몸을 올린 뒤 내려오는 힘으로 통후추를 빻는다. 공원에 설치된 철제 체조기구로 운동 흉내를 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부수는 것이다. 와작와작 빠직빠직 부서지는 소리에 나름 스트레스도 해소된다. 열 번 정도 되풀이해 후추 알갱이를 굵게 빻는다. 통에 담아 가는 것보다 훨씬 더 굵고 거칠게, 통후추 알갱이를 6~8쪽으로 나눈다는 느낌으로 갈면 된다. 조각이 균일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적당히 빻아 팬이나 냄비 바닥에 붙은 것까지 떼어내 한데 잘 모은 뒤 준비해둔 안심을 위에 올린다.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 후추 알갱이를 빼곡하게 붙인 뒤, 뒤집어 반대면도 똑같이 처리한다. 팬을 센 불에 올려 두른 기름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아주 뜨겁게 달궈, 레어(목표 온도 52℃)로 익도록 각 면을 3~5분 지진다. 접시에 담아 은박지로 덮어 10분간 두었다가 먹는다. 물론 후추와 별개로 고기에 소금간은 되어 있어야 한다. 

설탕 등에 절여놓은 딸기를 마지막에 후추를 뿌려 먹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설탕 등에 절여놓은 딸기를 마지막에 후추를 뿌려 먹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후추에 찍어먹는 딸기 맛은

고기를 구워 먹었다면 입가심 차례다. 믿거나 말거나 후추는 딸기와 아주 잘 어울린다. 다만 생딸기를 후추에 찍어 먹는 것보다는 조금 더 공을 들여야 한다. 딸기를 씻어 꼭지를 잘라내 칼로 세로 2등분 혹은 4등분 한다. 넉넉한 크기의 주발에 담아 넉넉한 설탕과 약간의 소금을 솔솔 뿌려 숟가락으로 잘 버무린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성인이라면 좋아하는, 혹은 집에 둔 리큐르를 약간 뿌려 주면 향이 배어 한층 더 맛있어진다. 압생트나 진 같은 종류는 물론, 싱글몰트 위스키나 럼, 심지어 보드카도 괜찮다. 맛을 들이는 데 30분 정도 걸리니 스테이크를 준비하기 전에 설탕에 재워두기 시작하는 게 좋다. 

스테이크를 다 먹고 딸기에 맛이 배었다면 공기나 유리잔 등에 나눠 담은 뒤 후추 약간을 갈아 위에 뿌린다. 후추 스테이크를 구웠다면 조금 남겨 두었다가 쓰면 딱 좋다. 딸기향에 한발 앞서 다가오는 후추의 향이 그저 설탕에 재웠을 뿐인 과일에 조금 더 세심한 표정을 불어넣는다. 조금 더 공을 들일 수 있다면 거품기로 휘저어 올린 생크림이나 마스카르포네 치즈에 후추를 더해 딸기 위에 얹으면 들인 공에 비해 꽤 그럴싸한 디저트가 된다. 

보통은 흑후추를 사용하지만 용도에 따라 백후추, 녹후추, 적후추 등을 쓰면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보통은 흑후추를 사용하지만 용도에 따라 백후추, 녹후추, 적후추 등을 쓰면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흑후추 너머의 세계

흑후추가 부엌의 대세이지만 다른 후추도 갖춰 둬서 나쁠 것이 없다. 일단 백후추를 권한다. 별것 아니다 싶지만 생선구이 등에 쓰면 살의 흰색을 거스르지 않고도 적절한 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사실 백후추는 흑후추의 껍질을 벗겨내 흰 속살만 남긴 것으로 향이 덜 두드러지고 덜 맵다. 생선뿐만 아니라 소스나 으깬 감자 등, 흰색 위주의 음식에서 후추의 존재가 두드러지지 않기를 원할 때 쓴다. 다음으로는 녹후추가 있는데, 정체는 덜 여문 흑후추 열매이다. 대체로 소금물에 절인 피클 등으로 생 열매를 먹고, 말리더라도 향이 흑후추만큼 오래가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적후추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흑후추와 다른 식물에서 나지만 열매의 생김새와 크기가 비슷해 가족 취급을 받는다. 딱딱한 흑후추와 달리 말린 열매가 가볍고 아삭하게 씹히면서 매운맛보다 단맛을 더 많이 내어 요리의 고명으로 많이 쓰인다. 이 네 가지 후추가 함께 담겨 갈아 쓸 수 있는 제품도 있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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