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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중간 착취’라는 직업

입력
2019.01.31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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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소속 업체가 바뀌는 방사선 관리 노동자의 국민연금 가입 증명서
수시로 소속 업체가 바뀌는 방사선 관리 노동자의 국민연금 가입 증명서

‘뉴스(News)’가 새로운 것들이라는 정의는 기자의 정신과 역할에 제한을 가한다.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새로울 게 없는, 오래된 문제인데 말이다. “뭐 새로운 게 있어?”라는 누군가의 지적에, 주삣주삣 꺼내놓았던 내 딴에 ‘중요한 문제’를 주섬주섬 다시 노트북의 오래된 폴더 안에 가둬놓는 일들을 기자 생활 동안 꽤 겪었다. 기자들도 약삭빠르게 적응한다.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된(그러나 중요한) 장애인 문제는 매년 ‘장애인의 날’에, 새로울 것 없는 젠더 문제는 ‘미투 1주년’에 신문지면이 더 너그럽게 포용해 준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춰 기사를 내놓는다. 독자들조차 오래된 문제를 다룬 기사에는 그다지 주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런 타협은 옳지 않다고 내 속의 무언가 속삭이고 있다. 오랜 문제들은 곪고 곪아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형태의 ‘새로운 사건’이 되어야만 언론이나 독자의 주목을 받곤 한다. 늘 있었던 문제인데, 마치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새삼스럽게 떨어야 하는 그 호들갑이라도 그나마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영남지역의 한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방사선 관리 노동자가 보내준 ‘국민연금 가입 증명서’는 오래되고 중요한 문제 속으로 나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20년 전부터 ㈜금강코리아 직원이었다가 한일원자력㈜ 직원이었다가, 하나검사기술㈜ 직원이었다가, 선광티앤에스 직원이었다가…(중략)…지금은 하나원자력기술주식회사 직원이라고 나와 있다. 20년간 그 원자력발전소를 떠나본 적이 없는데, 소속 업체는 10번 가량 바뀌었다. 그는 한국수력원자력과 거래하는 용역업체 소속이며, 1~3년마다 진행되는 입찰에서 한수원이 어느 업체와 계약을 맺느냐에 따라 소속 업체가 바뀐다. 용역업체는 인건비에서 약 30%를 떼어간다. 새로울 게 없는, 용역ㆍ파견직이라는 수많은 비정규직들이 사는 모습이다.

2017년 정책사회부에 근무할 때, 후배들에게 취재를 시켜서 용역ㆍ파견 업체 문제점을 기사(“파견업체가 내 월급 16%에 4대 보험료까지 떼가요” “효율 강조하더니 용역업체 배만 불린 파견제”)로 내보낸 뒤, 포털에 줄줄이 달린 댓글들이 짠했다. “내가 정규직ㆍ비정규직ㆍ파견용역 다 해봤다, 파견은 21세기 노예제도고 원청과 용역회사 거머리 배부르게 하는 악마의 제도다” “여의도 XXX은행 경비용역비 1인당 3,300만원인데 용역업체에서 1,200만원 가량 떼감, 한 달에 한번도 안 오고 용역본사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름, 파견 아웃소싱 업체는 중간에서 취업자 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존재다.” “이 나라는 구인업체와 인력파견ㆍ용역업체간 커넥션으로 노동자들 인건비 착취가 만연해 있지. 업체 입장에서는 갑질 하기 좋고, 쉽게 자를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용역업체들은 손쉽게 인건비 빼먹을 수 있어 좋고, 이래저래 노동자들 등골만 빼먹으려 드니…에휴.”

수십년간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상시직인데, 소속 용역업체만 바뀌는 이 ‘껍데기’는 무엇을 위함일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부가가치 생성도, 건전한 경쟁도, 혁신도, 능력주의도 아니며 노동유연화의 방식이라기엔 그 패악이 지나치다. 어디에서도 합목적성을 찾을 수 없는데, 1998년 파견법이 시행되고 20년이 흐르면서 ‘중간 착취’도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렸다. 방사선 관리 용역업체들이 “방사선 관리직이 한수원 정규직이 되면 용역업체 관리자 등 300여명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반발하는 것이 그 맥락이다. 실제 정규직화가 진행되면 용역업체 관리자들은 실업자로 잡히고 고용지표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이대로 가야 하나. 중간 착취 직종도 일자리 창출로 봐야 하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봤다. 기자를 포함해 나름 힘있는 직종을 파견ㆍ용역직으로 허용했다면 과연 이 정도로 조용하고, 무참하게 20년이 흘렀을까.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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