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소재문화재재단, 경매 나온 국보급 유물 찾아도 매입예산 넘으면 포기
2017년 10월 20일 미국 남부 조지아주의 작은 경매회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국인 남성의 초상화가 경매품 목록에 등장했다. 작품 설명은 ‘까만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기른 남자’, 경매사 추정가는 1만~1만 5,000달러(약 1,110만~1,670만원). 소장자가 별 가치 없는 작품이라고 여겼다는 뜻이다. 작자도, 제작 연도도 미상이었지만, 국외소재문화재재단(재단) 관계자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초상화 속 인물의 우아한 복장과 사실적 묘사 기법이 국내 19세기 초상화 양식을 빼 닮은 게 심상치 않았다. 경매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비상이 걸렸다.
전국의 회화사 전문가를 모았다. 컴퓨터 모니터에 뜬 사진을 샅샅이 들여다 보며 가치 있는 유물인지, 진품인지 확인했다. 결론은 ‘환수 대상 문화재 맞음’. 그림을 발견한지 닷새 만에 환수 팀을 조지아로 급파했다. 현지 확인 결과 그림은 조선 말기 문신 ‘강노’(1809~1886)의 초상화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엔 강노 집안 4대의 초상화가 이미 보존돼 있었다. 강노까지 더하면 5대가 한 자리에 모이는 셈이었다.
반드시 낙찰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응찰 가격을 마냥 올릴 순 없었다. 전문가들이 정한 ‘문화재 긴급매입비 상한선’을 지켜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중한 문화재라도 예외는 없었다. 지난해 재단에 배정된 문화재 긴급매입비 총액이 12억 2,000만원뿐이어서 상한액을 마냥 올릴 수도 없었다. “운이 좋았던 덕분에”(김상엽 재단 조사활용2팀장), 치열한 응찰 경쟁 끝에 31만 달러(약 3억 4,500만원)에 그림을 낙찰 받았다. 상한액에 찰랑찰랑하는 액수였다. 상한액이 조금만 낮았어도 강노 초상화를 영영 잃었을 거라는 얘기다.
강노 초상화는 수난의 근대사를 거치며 해외로 유출된 수많은 문화재 중 겨우 한 점이다. 소재가 파악된 해외 문화재는 지난해 기준 17만 2,316점에 달한다. 개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간 문화재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해외 문화재를 발굴, 환수하는 전문 기관으로 2012년 문화재청 산하에 설립됐다. 그러나 예산, 인력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재단의 활동 범위는 ‘전 세계’다. 소재가 알려진 문화재는 일본(7만4,742점), 미국(4만6,588점)은 물론이고 네덜란드(1,737점), 카자흐스탄(1,024점), 헝가리(341점), 바티칸(298점)까지 흩어져 있다. 수집가의 장롱에, 이름 없는 갤러리에 잠들어 있던 문화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강노 초상화도 미국 뉴욕 수집가의 컬렉션에서 한 카톨릭 교회로, 다시 조지아의 수집가로 옮겨 다녔다. 재단 모니터링 담당자들이 세계적 경매사인 크리스티부터 온라인쇼핑몰인 이베이까지 수백 곳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해저 보물 찾듯 수색하는 이유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환수한 17건(88점)의 문화재 중 9건(11점)이 재단이 경매에서 낙찰 받아 들여 온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 인장, 병인양요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부산 범어사 칠성도 등을 재단이 되찾아 왔다.
문제는 경매나 환수 협상에서 쓸 ‘실탄’인 국외 문화재 긴급매입비 예산이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의 끈질긴 압박으로 올해 예산이 50억원으로 올랐으나, 세계 시장 시세에 비하면 넉넉하지 않다. 불교 문화재의 경우 사찰 예산을 요청하거나 민간 기업 기부금으로 환수 재원을 충당하기도 한다. 김상엽 팀장은 “예를 들자면, 긴급매입비 상한액이 100만원인 상황에서 101만원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경매에 나오면 환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세부 목록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중요한 문화재를 경매에서 놓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소재가 파악된 해외 문화재는 2008년 7만6,143점에서 2013년 15만2,915점, 지난해 17만2,316점으로 늘고 있지만, 재단 인력 규모는 제자리걸음이다. 1월 현재 재단 직원은 26명으로, 여기엔 행정 요원 등이 포함돼 있다. 해외 문화재 모니터링은 2명이 전담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 환수 예산 부족 때문에 가치가 큰 문화재를 놓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성화를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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