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5>책방 여는 작가 곽정은
‘여성, 치유, 상담’ 있는 심리살롱 대표로
명상 접하고 상담심리학으로 대학원 진학
“성취 나누는 언니이자 롤모델 되고 싶어”
알고 보니 미래를 산 덕분이었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꿈 꾸며.
사람이 허무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 동안 오늘만 살았구나’ 하는 자각을 할 때다. 푯대 없이 그저 바쁘고, 정신 없이, 그래서 힘겹게 버텨내기만 한 오늘의 땀 속에서 보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았다. 내일에 지향점을 두면 오늘 내가 무얼 해야 할지가 보였다. 대학 때 꿈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다. 무엇으로? 글이었다. 어린 시절, 터울 많은 오빠와 언니는 멀었고, 책은 가까웠다. 읽고 읽었던 책은 글짓기의 좋은 연료가 됐다. 고3 땐 논술이 한국일보에 여러 번 우수 사례로 실리기도 했다. ‘그래, 기자가 되자.’
여성지 ‘휘가로걸’과 ‘싱글즈’를 거쳐 꿈의 직장으로 여겼던 ‘코스모폴리탄’(코스모)에 입사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잡지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된 초년 기자 때도 그의 눈은 현실 너머에 있었다. 코스모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자만 하고 말 건가? 그 다음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에 생각이 미치니 답이 나왔다. ‘아니야, 나는 책도 쓰고 강연도 하며 살 거야.’ 3년 뒤 거짓말처럼 출판 제의를 받았다. 야근하고 집에 들어와 녹초가 돼서도 하루에 1, 2꼭지씩은 꼭 글을 썼다. 2009년 첫 책을 낸 지 벌써 10년, 2월엔 공저 2권을 포함해 9번째 책이 나온다.
“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전 직장 선배들이 얘기를 해주며 웃더라고요. 제가 유명해져서 책 쓰고 강연하면서 살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언제나 일하는 사람으로서 지평을 넓히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2013년 첫 고정 출연 프로그램인 JTBC ‘마녀사냥’은 곽정은(41)을 연예인에 준하는 작가로 만든 계기다. 유명세라는 홍역과 인지도가 주는 힘이 함께 찾아왔다. “유명해져서 치른 대가가 분명히 있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난 받아야 하는 일 같은. 하지만 누군가 그럼 시간을 돌려서 유명해지지 않고 그냥 조용히 기자로만 살 거냐고 묻는다면? 그럴 생각 없어요. 제게 온 기회를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긍정적인 의미의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니까. (웃음)”
인지도라는 권력으로 그는 또 다시 확장을 준비한다. 자아와 진정으로 만나게 해준 명상, 그로 인해 얻은 마음의 평온함을 나누고 싶다. “명상으로 외부의 기능적인 나와 내 안의 암반 같은 진짜 나를 연결하는 길을 뚫은 것 같아요. 그 둘이 만나는 경험을 하고 나니까, 지금은 별로 겁날 게 없죠.” 나이 마흔, 외풍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게 됐다.
오는 22일 그래서 그는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특별한 책방을 연다. 여성, 심리 상담, 명상, 강의, 그리고 책이 있는 곳, 그의 표현대로라면 “곽정은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곳”이다. “우리 세대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확신을 주는 언니 세대가 별로 없었어요. 지금도 남성에 비해선 훨씬 적죠.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어도, 어릴 때부터 주목 받을 기회가 주어진 게 아니어도, 자신의 지향대로 삶을 이끌어 나가다 보면 힘을 갖게 되고 그걸 누군가에게 나눌 수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 연애가 시시해진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어떤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지금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더구나 이런 거사를 앞두고 있는데. (웃음)”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이글이글거리는 듯 반짝였다.
◇‘19금 전문’, ‘연애박사’는 내 정체성 일부일 뿐
-책방을 연다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생각한 건가요?
“이제는 ‘프라이빗 심리살롱 헤르츠 대표’라는 명함을 새로 만들게 됐죠. 1, 2년 전부터 희미하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기자를 할 때도 책 소개 담당을 오래 했고, 어릴 때부터 워낙 책을 끼고 살기도 했고요.”
여기까지 얘기하다가, 그는 이런 설명에 공을 들였다. 그간 대중에게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가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음, 사람들은 대부분 ‘연애 칼럼니스트’, ‘19금 전문’, ‘연애 전문가’ 같은 수식어로 알고 있지만, 저의 정체성은 ‘기자 출신의 작가’예요. 글을 쓰는 플랫폼이 달라져왔을 뿐이죠. 그러니 좋은 글을 내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지향점이에요. 그런데 삼십 대 후반을 넘어 마흔 살이 되면서, 내 지향점을 바꾸고 싶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 내가 확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 인생의 모토는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지 말자는 건데.”
가벼운 질문을 던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질문에 얘기가 더 깊이 들어갔다.
“책이나 강연으로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할 만큼 했으니 내 공간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찾아 오게 하고 싶었어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고 싶었죠. 그런 생각이 쌓여나갈 무렵 인도에 가서 명상을 공부하고 왔고, 이후에 대학원에서 상담심리 공부를 시작했죠. 내 인생에 들여온 모든 걸 한 공간에서 구현하고 싶어요.”
-헤르츠가 어떤 책방인지 궁금해져요.
“이전의 책방과는 결을 달리 하는 곳이죠. 서점이기는 한데, 새로운 책(신간)은 극히 일부일 거예요. 주로 심리학 서적이나, 한국사회의 문제를 다룬 책, 또는 치유에 관한 책을 놓을 생각이에요. 또 거기서 제가 해오던 강의나 명상, 북 세미나도 하고요. 또 전문가들이 심리 상담을 하는 공간도 따로 마련했어요. 퍼블릭(public)하면서도 프라이빗(private)한 공간이 될 거예요.”
-헤르츠는 무슨 뜻인가요?
“독일어 Herz에서 따왔어요. 마음, 영혼, 심장, 감정, 가슴… 이런 심리와 관련된 뜻을 포괄하는 단어예요.”
-TV에서 연애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지다 보니 상담을 요청하는 이메일도 많이 받았겠네요.
“맞아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위로를 부탁하는 이메일도 있고, 이건 정말 경찰서에 가거나 여성단체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문제인데 싶은 사연까지 다양하죠. 그런데 제가 이메일이나 글로 해주는 조언은 한계가 분명하니, 그 미진함이 쌓여서 제 안에 과제를 남겼나 봐요. 아, 가장 중요한 걸 빼놓을 뻔 했네요.”
-뭐예요?
“기본적으로 (헤르츠는) 여성 전용 공간이에요. 그간 제가 했던 활동이 여성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었잖아요. 여성지 기자로 여성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었고, 시즌3까지 진행한 명상 프로그램(Being Awake)도 여성 대상이고요. 그렇다고 남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여성들끼리 이뤄지는 프로그램이 많을 거예요. 동성끼리 있을 때 마음의 문이 확 열리기 쉬우니까요.”
-그간 곽정은이란 사람이 좋아했던 것이 한 공간에 다 모이겠군요.
“맞아요. 그러면서 여성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기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도록 돕고 싶죠. 여성지 다닐 때 20, 30대 직장 여성들이 알아야 할 노동법 기사를 쓰자고 하면 절대 안 받아들여졌거든요. ‘이게 (얘기가) 되겠어?’는 반응이었죠. 매체의 특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쓸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저는 어쨌든 제안했어요. 이제 회사를 나왔으니 그 공간에서 못했던 시도를 이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펼칠 수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는 저의 과거와 미래가 조우한다는 의미도 있겠네요.”
-그 시절에 여성지에서 노동법 기사를 발제했다니, 재미있네요.
“늘 내 동년배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죠. 하지만 여성지 기자니까 정작 나는 주로 말랑말랑한 콘텐츠를 써야 했죠. 그러니 100을 취재해도 늘 60 정도 밖에 쓰지 못했고요. 그래서는 삶을 바꾸기에 미약하다는 자각이 생겼고, 그게 내 안에서 빈 칸으로 남았어요. 작가로서 욕망은 어느 정도 풀었지만, 시민으로서 이 사회를 좀더 좋은 쪽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은 원하는 만큼 풀지 못했고 그럴 플랫폼도 없었죠. 그래서 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기도 해요.”
◇곽정은도 사랑이 마음대로 안됐다
-(TV 예능) ‘마녀사냥’에 출연한 이후 많은 게 바뀌었죠?
“그렇죠.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이 무섭기도 했어요. 어디 다니면 알아보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아진 건 감사했지만, 반면 대놓고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겼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취직한 지 3년 만에 원하던 매체에 들어가고, 그 4년 뒤인 2009년 첫 책을 냈어요. ‘마녀사냥’ 출연 시작한 건 2013년이죠. 4년을 주기로 한, 재미있는 ‘스텝 바이 스텝’이에요. 2013년 이후 6년이 걸리긴 했지만, 이제 내가 만든 공간에서 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죠. 이 지점에 오려고 그랬구나, 그래서 그 경험이 다 필요가 있구나 싶어요.”
-미디어로 접했던 것이긴 하지만, ‘마녀사냥’ 때와 달리 중심이 생긴 느낌이에요.
“그 때의 마음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마녀사냥’은 제 첫 고정 출연 프로그램이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기도 했고요. 녹화하는 시간이 행복했죠. 그땐 ‘잘 해야 해!’라는 생각으로 충만했어요. 직장인 신분을 유지하면서 출연했던 때니까 여러 가지로 실수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죠. 프로그램의 전체 흐름을 생각하기보다는 ‘오늘 내가 준비한 이 멘트 꼭 해야 해’ 같은.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죠. 내가 나 자신에게, 또한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편안해졌어요. 그때는 연애 상담을 하면서 ‘여러분, 자존감을 가지세요. 자존감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할 필요는 없어요’라고 해도 내 영혼까지 털어 넣은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내면과 더욱 일치하는 느낌이죠.”
-심리학 공부는 왜 시작했어요?
“명상을 하게 되면서요. 명상은 제가 감정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이 됐죠. 그간 저는 자존감에 관한 심리학 서적, 관계에 관한 자기계발서를 마치 씹어 먹듯이 읽어왔던 사람이니까, 그런 문제가 생겨도 잘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답이 명상이었어요. 호흡에 집중하면서 나의 생각과 마음을 마주해 내가 누군지 깨닫는 과정이죠. 그런데 명상을 경험하고 나니까 상담심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뚜렷해졌어요.”
-명상을 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그건 말하기 무척 조심스럽네요.”
-왜요?
“저는 정작 걸어왔던 삶에서 삐걱대거나 실패한 경험에 담담하거든요. 그런데 저를 잘 모르는 타인들이 제 일에 평가를 하고 싶어 하니까요. 상대가 있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한참 뜸을 들이다 그는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그의 마음을 얻고 싶기도 하잖아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저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은 때도 있었어요.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으면 내가 아는 지식으로 이렇게 대화해서 공감해주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나를 고쳐보거나 하는 걸로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렇다면 힘들었던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 자기 마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잘 모르거든요. 그러니 내 마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또 그 사람 마음을 받아들이는 데도 오해가 생기는 거죠. 내 마음을 더 들여다 보고, 쌓인 슬픔을 해결하고 싶었어요. 사실 많이 힘들었죠.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 ‘연애 박사’, ‘연애 전문가’인데 정작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힘든 시간 겪는 게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연애를 하면서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단 말이에요?
“그 전에는 그 만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전에는 포기를 한 적도 있고, ‘에잇, 싫으면 말아라’ 했던 때도 있고요. 다양한 이유로 그 지점까지는 가지 않았죠. 전에는 남들처럼 사랑을 했으니까요. 버티고 버티다 싸우고 싸우다 어느 선에서 타협하듯이 헤어졌던 거죠.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삼십 대 후반이었고, 반복적인 문제라면 이유가 뭔지, 결국엔 끝날지라도 깊게 들여다 보고 싶더라고요.”
그것은 그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최선을 다해보자는 결심이었을 거다.
◇명상으로 만난 진짜 자아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인도에 갔어요. 돈을 엄청나게 들여서. (웃음) 감사하게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하루 12시간씩 수업 듣고 명상하고 수업 듣고 명상했죠, 일주일간.”
-어땠나요?
“사랑하던 사람과 힘든 점으로 생긴 마음의 고뇌도 풀리고, 네댓 살 때부터 가진 고민도 해결했죠. 그래서 그때 이후로는 연애 상담도 ‘그 남자를 이렇게 바꿔보세요’에서 ‘이 문제를 통해서 당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요’로 바뀌었죠. 명상은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자책, 원망이 아니라 내 안에 뭐가 있기에 그런 것인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니까요.”
네댓 살부터 가진 의문이 뭔지 물어보려던 찰나, 그가 먼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돌아다니고 말을 하고 음식을 먹는 내가 진짜 나인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내면의 단단한 암반 같은 내가 진짜 나인가 하는 의문이요. 돈 많이 벌면 멋지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은 궁핍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명상을 통해서 깨달았어요. 일을 하고 스트레스 받는 그런 기능적인 나도, 진짜 나와 연결돼있다는 자각을 한 거죠. 그 둘이 만나는 경험을 하니까 ‘이게 안 되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기능적인 내가 잠시 실패했을 뿐이니까.”
-그 둘을 만나게 하고, 점점 일치하게 만든다는 거군요.
“맞아요. 그런데 명상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보통 이렇게 말해요.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는 거야?’ 하하. 그런 게 아닌데.”
-연애 얘기만 할 거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도 하겠죠.
“무슨 남자 유혹하는 법, 잠자리 테크닉이나 쓰는 사람 아니냐고 오해하는데, 그런 기술적인 건 내가 쓴 글의 10%나 될까요. 코스모 기자니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도 했고요. 사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사랑을 잘하는 노하우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나답게 살면 사랑의 품격도 달라진다는 거죠. 더 근사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 열린다는.”
-명상으로 뭐가 달라졌나요?
“제일 좋은 건 나와 연결되는 경험이죠. 밤에 너무 배고파서 눈이 확 돌면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가 있잖아요? 다 먹고 나면 어떤가요. 죄책감이 들죠. 라면 끓인 나와 죄책감 드는 나는 결국 나인데. 라면 한 그릇으로도 그런 분리를 경험하죠. 그런데 명상을 하고 나서는 어떤 상황에 맞닥뜨려도 둘이 분리 되는 일이 적어졌어요. 제가 저에게 묻고 명료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일이 가능해진 거예요. 나쁜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예전엔 그 파도에 휩싸여서 꼴깍꼴깍 했다면, 지금은 그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거죠. 명상과 안정, 자존감, 성공, 행복, 치유는 다 같은 원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때 명상을 알게 해준 그 남자와는 결국 헤어졌다. “끝내야겠구나,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구나, 하는 것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줬거든요.”
◇연애도 결국 인생의 일인데
-어렸을 때 곽정은은 어땠나요?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을 계속하는 타입. (웃음) 늘 혼자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함께 있을 때는 끊임없이 말을 시켜서 아주 귀찮았대요. 오빠는 제가 초등학생 때 고등학생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서 함께 놀지 못했고, 네 살 터울 언니는 테니스를 했어요. 엄마, 아빠는 장사를 하면서 언니 뒷바라지 하느라 늘 바빴죠. 그러니 유치원도 안 다녔던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런 때 책을 보거나 동화를 지어서 썼던 기억이 나요.”
-기자가 되고 싶었나요?
“꿈은 아니었어요. 대학 때 꿈은 짧은 글로 세상 바꾸자, 그래서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죠. 글을 곧잘 쓰기도 했고요. 하지만 IMF구제금융 사태가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그는 97학번이다)라 광고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많이 뽑지 않았어요. 경험이나 쌓아놓자 싶어서 휴학을 하고 TTL매거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죠. 편집장과 쓸 기사를 논의하고 채택되고 취재하고 수없이 퇴짜를 맞으면서 기사를 써내서 발간되는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렇다면 기자가 돼보는 것도 세상 바꾸는 일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 나름 토익 점수도 높고 우등 졸업을 했지만, 면접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더라고요. 그 와중에 들어간 곳이 월간지였죠. 2001년 12월 웅진닷컴에 입사해서 2002년 ‘휘가로걸’로 발령을 받았어요.”
-연애 칼럼은 왜 쓰게 됐어요?
“그때는 막내 기자라서 칼럼보다는 새로 생긴 밥집을 취재하거나 맨 뒤에 붙는 별자리운세 정리하는 일을 맡았죠. 그러다가 한번 기사를 시켰는데 빨리 잘 써오니까 선배들이 계속 아이템을 주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막내 기자가 쓸 수 있는 피처기사는 한정적이었죠. 그때 인생에서 경험한 걸 쓰자는 생각에서 편집장한테 여자들의 연애에 대한 생각을 다뤄보고 싶다고 제안서를 냈는데 맡겨졌어요. 그런데 의외로 쉽고, 또 잘 써지더라고요. 물론 지금 보면 ‘어떻게 이렇게 썼지’ 싶은 기사도 있지만, 그건 그 시절의 나, 그때까지의 경험이 그랬으니 그런 것이고 그 시절 나로서는 가장 잘 쓸 수 있는 기사를 썼던 거예요. 연애를 소재로 삶을 얘기하는 기회를 잡은 거죠. 코스모로 이직하면서 다른 많은 여성 기자들은 ‘그거 너무 야해서 내가 어떻게 써요’ 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기사 자꾸 쓰다가 시집 어떻게 가려고 그래’ 하기도 했지만, 저는 결국은 이 기사도 사람과 관계, 거기서 오는 행복에 관한 거라고 생각했죠.”
-나이에 따라 연애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20대 때는 저도 경험이 별로 없고, 남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많았기에 남들만큼 괜찮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게 20대의 큰 성과죠. 30대엔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 이후의 연애라서 깊이는 좀더 있어졌죠. 그 많은 연애는 저를 깨달음으로 이끌었어요. 그래서 그때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당신이 있어서 그 시절을 잘 지날 수 있었고 그 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또 당신이 떠나고 나서 그렇게 힘들었지만 그래서 내가 다른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었다고.”
-지금은요?
“이제 40대 초반인데요, 지금은 좀더 성장하고 확장해서 좋은 의미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 한 명의 마음을 얻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결국 연애는 내가 맞을만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둔 상태잖아요. 하지만 그 친밀도를 유지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때론 많은 공을 들였더라도 그 사람이 변할 수도 있어요. 그 때 (회복에) 쏟아 부어야 하는 에너지도 있죠. 그걸 다 아는데 왜 또 시작하겠어요?”
◇세상의 어법 따랐다가 치른 수업료, 이혼
-결혼은 왜 그렇게 일찍 했나요?
“그러게요. 꼽아보니, 올해가 이혼 10주년이네요. 첫 책 10주년이기도 하고. 정말 다행스러운 10년이었어요. 그 때는 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이 강했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섣불리, 그리고 아주 빨리 결정했어요. 당시 저로서는 그 결정 또한 옳았고 절박했지만. 결과적으로 결혼과 이혼 덕분에 격동의 시기를 보냈으나, 그 이후로 제 인생에서 다른 일들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세상의 어법에 충실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비싼 수업료를 내고 그게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죠.”
-결혼 결정도, 이혼 결단과 결행도 빨랐네요.
“제가 미적거리는 성격은 애초에 아니어서요. 그 때 처음으로 제가 저와 접촉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면서. 내가 겪은 상처가 있어서 누군가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게 감사해요. 누군가는 ‘이혼한 주제에’ 라는 편견도 갖겠지만, 대수롭지 않아요.”
-방송으로 유명해지는 대신 유명세, 그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도 만만치 않죠. 유명해지면서 힘이 생기기도 했을 거 같고요.
“저는 지금까지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으로 여기까지 뚜벅뚜벅 잘 걸어왔어요. 그런데 그 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말하고 비난하기도 했죠. 그런 대상이 된다는 게 유명세였어요. 저는 연애나 사랑을 소재로 인생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그런 글을 써왔던 사람인데 방송에서 때로 어쩔 수 없이 말한 것만 보고서 얘기하니까 안타까웠죠. 그에 비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은 너무나 많죠. 칼럼 하나를 써도 파급력이 커졌고요. 많은 사람 앞에서 강연할 기회도 얻었죠. 그 현장에서 받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사실 현장에서 강의로 호흡하지 않았다면 좀 힘들었을 수도 있었어요. 인터넷에 사는 사람들, 그들이 적는 피드백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하지만 현장에 가면 수백 명이 제 얘기를 들어요. 그들의 마음에 제 말이 씨앗으로 뿌려지죠. 그래서 더 어깨가 무겁긴 하지만.”
-지금은 인생의 목표가 뭐예요?
“좋은 의미의 권력을 갖고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권력자라는 단어는 탐욕적이고 돈을 밝히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이미지가 강해서 좋지 않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운데, 저는 좋은 의미의 권력자가 되고 싶어요.”
◇마시고 죽자? ‘나는 죽지는 않는다’
-2월에 새 책도 나오죠?
“서점 오픈이 2월 22일 즈음인데, 그쯤 책도 나올 거 같아요. 이번 책은 그간 쓴 책과는 완전히 결이 달라요. 지금까지의 나를 집대성 하되, 그 안에 성장을 담았죠. 흔히 하는 표현으로 하면 ‘자전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죠. 내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그는 인터뷰 뒤 인스타그램에 “공들여 정한 책 제목을 미리 알린다”며 ‘혼자여서 괜찮은 하루’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지은 이유가 짐작 됐다.
-지금이 인생의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네요.
“그렇게 되어 버렸죠. 이 시기가 이렇게 온 것에 감사해요. 20대에는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너무 중요했고 30대는 일에서 인정 받는 게 중요해서 뭐든 열심히 했고, 심지어 책도 매년 냈죠. 이제는 다른 차원으로 가고 싶어요.”
-앞서 말한 헤르츠라는 거사도 눈 앞에 있고요.
“상징이죠. 앞으로 살고자 하는 방향성의 상징. 내 인생을 운영하는 일이죠. 이 큰 버스를 운행해야 하는데 도시락 까먹으면서 할 수는 없잖아요. 연애라는 주제를 통한 성장은 다 한 거 같아서요. 이제 다른 것을 통해 성장하고 싶은 거죠.”
-곽정은이라는 이름 앞에 직접 수식어를 붙인다면요?
“글쎄요. 작가, 방송인, 강연자라는 타이틀은 유지하되, ‘프라이빗 심리살롱 헤르츠 대표’라는 직함이 하나 더 붙었죠. 예전에는 사실 연애 테크닉이 궁금해서 그 기사를 쓰는, 남자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했던, 어리고 어린 영혼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언니로서, 그리고 먼저 많은 일을 경험하고 성취한 사람으로서 그 과정에서 얻은 걸 전해주고 싶어요. 저 역시 뭉툭하고 어설펐던 20, 30대를 지나 지금 굉장히 정교해지고 있거든요.”
-곽정은이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그리고 앞으로도 지키고 싶은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품격 있게 살고 싶었어요. 아무리 큰 슬픔이 다가와도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죠. 또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파도가 나를 몰아치더라도 그 안에서 파도에 때론 때려 맞아서 물속에 잠깐 들어갔다 나와도 품위를 유지하고 싶었어요. 우아한, 고품격 이런 단어들이 이미 오염돼서 안타까운데, 가장 근접해서 표현하자면 품격 있는 삶이죠. 종교는 없지만, 영성을 중시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흔히 ‘인생 뭐 있어? (술) 먹고 죽자!’하는데, 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죠. ‘내가 이거 먹고 죽지는 않는다’고 생각을 하지.”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 또한 마음 한 편에는 ‘적나라한 연애 얘기로 뜬 사람’, 그래서 ‘기자나 작가라기 보다는 방송인’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기는 그러니까 그가 명상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거기다 책방까지 연다니 그 사연이 궁금해졌을 수도 있겠다. 만나고 나니 요즘 방송에 비친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이유를 알 듯하다. 그리고 그가 ‘어쩌다 유명인’이 된 게 아니란 것도.
그는 아마 자기만큼 연애 칼럼을 많이 쓴 기자는 없을 거라고 했다.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연애 고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연애의 시작과 완성은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다. 이 당연한 걸 머리만 알아서 문제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그의 말대로 인생의 전부다. 자기 자신과 끝나지 않을 연애를 아주 진지하게 시작한 그가 비결을 나눌 채비를 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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