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15년 전에 나온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의 제목이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분야 책임자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다 준 신화 속 인물이니까, 오펜하이머 평전의 제목으로 이만한 작명이 있을까 싶다. 20세기를 특징짓는 딱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1945년 8월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선택한다. 인류는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손에 넣었다. 핵무기 투하를 주저 없이 승인했던 트루먼 대통령의 말마따나 ‘우주의 기운’이 담긴 에너지였다. 이 에너지로 발전소를 짓기도 했지만 첫 용처는 불행히도 상상을 초월하는 살상력을 지닌 무기였다. 폭탄 하나로 도시 전체를 초토화시키며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신개념의 대량살상무기가 처음 등장하면서 수천, 수만 년을 이어 온 전쟁의 개념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었다.
핵무기가 지닌 엄청난 에너지의 비밀에는 20세기 과학의 위대한 성과인 상대성이론(E=mc²)이 담겨 있다. 1942년에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는 당시 기준으로 2조 원이 넘는 돈을 투입하고 수십만 명을 고용했던, 20세기 ‘빅 사이언스’의 시초였다. 신무기 하나로 전쟁을 끝낸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해 전후 세계질서를 주도했다.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하는 데에도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세기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들이 여기 다 들어있고 지금도 우리 삶을 규정하는 세계질서가 이때 형성되었다.
핵무기 사용으로 일제가 항복하고 하루라도 빨리 광복을 맞았으니 어찌 아니 기쁜 일이겠냐마는, 우리 손으로 식민지의 마지막 단계에서 직접 침략자를 몰아낼 기회를 갖지 못한 아쉬움도 작다고는 할 수 없다. 그 기쁨과 아쉬움의 엇갈림은 광복 뒤의 분단과 내전과 오랜 군사독재의 역사에, 민주화를 이룬 지금 21세기에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북한과 미국의 2차 정상회담은 20세기가 남긴 마지막 악폐로서의 동북아 냉전구조를 타파할 결정적인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핵무기로 촉발된 한반도의 질곡을 70여 년이 지나 한반도의 비핵화로 풀게 생겼으니 인간의 역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늘과 내일 베트남에서 어떤 소식이 들려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년 싱가포르에서 북미 두 정상이 대체 한 게 뭐가 있냐고 질타하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를 지레 깎아내리기 바쁘다. 일부에서는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북한 퍼주기’ 논란이 일고 있다. 북한에게 또 속는 것이다, 이러다 적화통일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갑자기 커졌다.
냉전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핵실험도 미사일 발사도 없었던 지난 1년 동안의 극적인 변화가 마뜩잖을 것이다. 북한이 세계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기에는 그 반대급부로서의 보복이 너무나 치명적이다. 게다가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과 재래식 군사력, 산업역량 등의 토털파워를 생각하면 우리가 적화통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북한이 자본주의식으로 흡수통일 되는 것을 우려하는 마음이 수십 배는 더 클 것이다. 한국전쟁 당사자들이 실질적으로 종전을 선언한 뒤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면 그보다 더 ‘적화통일’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길도 없다. 남북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들은 이미 진행 중이다. 자신이 병역을 기피했거나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고관대작들은 잘 모르겠지만, 총칼을 드는 대신 돈을 퍼 줘서 평화를 살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다. 아니, 그 ‘퍼주기’가 곧 ‘통일대박’임은 몇 년 전 자신들이 시인하지 않았던가. 일부 언론에서는 2차 북미회담의 결과가 이른바 ‘스몰딜’이냐 ‘빅딜’이냐를 두고 논란이 많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점은 2년에 걸쳐 북한과 미국이 대화와 타협으로 ‘딜’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이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과학자에게 2019년은 러시아의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만든 지 150년이 되는 해, 영국의 에딩턴이 일식탐사로 일반상대성이론을 최초로 검증한 지 100년이 되는 해,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달에 착륙한 지 50년이 되는 해로 다가온다. 한국인에게 2019년은 3ㆍ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가장 큰 의미일 수밖에 없다. 그때는 남한도 북한도 없었다. 이제 우리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하나 더 얹을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 모두가 한반도의 냉전을 걷어내고 평화의 온기를 가져올 ‘코리안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 할 때다. 지금의 우리는 100년 전의 선열들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 속에 있다. 2119년의 후손들은 기미혁명 200주년과 함께 동북아의 냉전을 끝내고 한반도 평화공존의 새 시대를 연 100주년도 함께 기념할 수 있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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