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7>헌법주의자 이석연 전 법제처장
“전직 대통령 구속, 국가 품격 생각하면 창피…내란죄도 아닌데, MBㆍ박근혜 사면해야”
이석연(65)은 논쟁적인 법률가다. 1999년 ‘군 가산점’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게 그다. 그런데 10년 뒤엔 부활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년 전 여성단체의 환호가 반발로 바뀌었다.
그런가 하면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신행정수도특별법) 역시 그가 낸 헌법소원으로 2004년 폐지됐다. 당시 서울시장으로 용꿈을 품고 있던 이명박(MB) 전 대통령에게는 천군만마 같은 사건이었다. MB가 고맙다고 밥을 샀다.
그러나 4년 뒤 ‘MB 청와대’는 법제처장인 그를 ‘요주의 인물’로 분류했다. 국무총리에게 그의 ‘입’을 단속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청와대 문건이 발견됐다. ‘한미 쇠고기 협상’의 후속 조치인 ‘쇠고기 장관 고시’를 두고 “내가 재야(在野)에 있었다면 헌법소원을 냈을 것”이라고 한 인터뷰 때문이다. 쇠고기 협상 논란으로 MB 청와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MB 정부의 만기친람도 박근혜 정부 못지 않았다. 당시 법제처가 홍보대사로 배우 이준기씨를 위촉하자, 청와대는 그의 정치 성향을 운운하며 취소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는 “판단의 잣대가 늘 헌법이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누구의 편을 들려는 것도, 생각을 바꾼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군 가산점도 그렇다. 경쟁이 치열한 공무원 시험에서 제대군인에게 3~5%의 가산점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당락을 결정 짓는 요인이 된다. 군 복무 의무가 없는 여성이나 면제 대상인 장애인의 헌법상 평등권,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제도 폐지 역시 병역의무 이행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한 헌법(39조 2항)에 위배되기에 국가가 보완 조치를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부활론을 폈다.
MB의 정치생명을 휘청거리게 한 행보도 헌법에 따른 것이지, MB를 보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명박ㆍ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불편했나 보다. 두 정부 때 청와대 참모들은 그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지만, 대통령들은 지명하지 않았다.
변호사로 돌아간 이석연은 다시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었다. 지난달 27일 만난 그는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주장했다.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면 두 대통령 모두 문재인 대통령이 사면해야 해요.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결단해야 해요. 내란ㆍ외환죄로 구속된 대통령들(전두환ㆍ노태우)도 사면했지 않나요? 전직 대통령을 죽을 때까지 가두는 게 촛불혁명의 완성은 아닙니다.”
열 여섯 살 때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고교 진학 대신 대입 검정고시를 택해 합격했다. 그것도 중학교를 졸업한 지 반년 만에. 그렇게 번 2년 반 동안 절에 들어갔다. 그 때 읽은 책 500권은 인생의 든든한 밑천이다.
인터뷰에서도 동서양을 넘나들며 고전의 문구를 시시때때로 인용했다. 그가 대표변호사로 있는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서울’의 사무실 곳곳엔 ‘책탑’이 즐비했다.
◇고교 진학 대신 절에 들어앉은 청소년기
-이력을 보고 새삼 놀랐어요. 중학교 졸업 6개월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요?
“중학교도 수석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했죠.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하기 3개월 전에 검정고시라는 제도가 있는 걸 알았어요. 집에다가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했더니 난리가 났죠.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으니. 그래도 내 고집대로 했죠. 6개월 만에 전라북도에서 수석으로 합격했어요. 중학교 졸업한 해 8월에 고졸 학력을 얻었으니 신문에도 크게 기사가 났었어요.”
-그럼 그때 바로 대학에 입학한 건가요?
“아니요.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들어갔어요. 30개월 동안 책만 읽었죠. 400, 500권쯤 될 거예요. 금산사에 딸린 심원암이라는 암자에서 1년 반, 본절로 내려와서 1년 정도 있었죠. 그때 금산사 주지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월주 스님이었어요. 그때 인연으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할 때 스님을 공동대표로 모시기도 했죠. 지금도 정기적으로 뵙고요.”
-검정고시는 왜 봤나요?
“내 생활의 모토가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거예요.”
-그 어릴 때부터요?
“네, 그 때부터 내 힘으로 남이 안 하는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검정고시를 보지 않았다면, 그때 전북에서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다 모였던 전고(전주고등학교)에 갔겠죠.”
-그런데 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도 왜 절에 들어갔어요?
“허기가 진 거죠. 바로 대학에 들어가기보다 간접 경험이라도 해서 지식의 욕구를 채우자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하고요?
“아버님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어머니께 제가 그랬어요. 경기고 시험 봤다가 떨어져서 재수한다고 생각하고 6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웃음)”
그는 그 시절 독서로 얻은 지식과 지혜가 삶의 원동력이자 자양분이라고 말했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사마천의 ‘사기’는 지금도 손에서 놓지 않는 책”이라며, 책상 한 편에 있는 ‘사기열전’을 가리켰다.
◇공익소송으로 헌법을 생활 속에
고교 시절을 학교 안의 교실이 아닌 지성의 바다에서 보낸 뒤, 전북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리고는 행정고시(23회)에 붙어 법제처에 근무하던 중 사법고시(27회)까지 합격했다. 이후 운명처럼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로 발령을 받았다. ‘1호 헌법연구관’이라는 별명이 그래서 붙었다.
-헌재에 근무하면서 헌법의 실체를 느낀 계기가 있나요?
“이제는 고인이 되신 변정수 헌법재판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 분 밑에서 5년간 상임연구관으로 일했거든요. 전설적인 재판관이죠. 변 재판관은 헌법을 생활규범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 시절만해도 헌법이 명목적인 규범 같았으니까요. 그때 헌법소원으로 헌법을 살아서 움직이는 법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헌재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 헌법소원이 생소했을 때죠. 변호사로 개업해서 헌법소원을 통한 공익소송을 전문으로 해보기로 했죠.”
-가장 대표적인 게 제대군인 가산점 제도 위헌 소송이지요?
“맞아요. 지금도 논쟁거리죠. 군 가산점이 헌법상 평등권, 공무담임권, 직업 선택의 자유에 위배된다고 해서 냈고 헌재에서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이 났어요. 그때가 12월이었는데 바로 이듬해 1월 중등교사 임용시험부터 적용되니까 남자들이 난리가 났죠. 내가 현역으로 군 복무를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돌 맞을 뻔 했어요. 거기다 딸도 없고 아들만 셋이고. (웃음)”
-그런데 법제처장 할 때는 왜 부활을 주장한 건가요?
“사실 나는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낸 헌법소원의 취지대로 결정문이 나와서 나도 놀랬죠. 바로 해당 법률이 효력을 잃는 단순 위헌과 달리 헌법불합치는 위헌성은 인정하되, 법의 공백에 따른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개정 때까지 한시적으로 법률을 존속시키는 결정이거든요. 헌법 39조 2항에 명시된 병역 의무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을 권리에 비춰보면 군 가산점 제도를 아예 폐지할 것이 아니라 보완 조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산점의 정도를 1%쯤으로 낮추자는 거죠.”
-경실련이라는 진보적인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죠.
“변호사로 개업한 이유 중 하나가 시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공직에 있으면서는 할 수가 없으니까. 1994년 참여연대를 만들 때도 참여했다가 나중에 경실련에 합류했죠. 시민운동을 통해서 사회를 바꾸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후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라는 보수단체의 상임대표도 맡았잖아요.
“처음에는 정치개혁운동을 하는 단체인 줄 알았어요. 뉴라이트 개념도 잘 몰랐을 때고요. MB와 가까웠던 김진홍 목사가 상임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와서 수락했죠. 그러면서 정치권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조건으로 걸었거든요. 그런데 2, 3개월 지나면서 보니까 너무 (한나라)당 문제에 관여를 많이 하는 데다 MB 쪽으로 기울어지더라고요. 당시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있어서 박근혜 쪽과 치열하게 대립할 때였거든요. 게다가 뉴라이트의 역사관에도 나는 찬성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바로 선을 긋고 일체 관여하지 않았어요. 물론 MB캠프에도 간 적 없고요. 다만, MB가 헌법 문제 관련해서 의견을 구해오면 조언을 해주는 정도였죠.”
-MB를 처음 만난 건 언제인가요?
“MB가 서울시장을 할 때 어느 행사장에서 인사를 했죠. 그 이후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당시(2003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는 행정수도 신설을 위한 신행정수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예요. MB가 헌법소원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미 이 법이 가결되면 헌법소원을 내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MB에게는 알아서 하시라는 식으로 말을 했죠. 나는 이미 나대로 계획이 있었으니까. 헌법소원은 정치권의 관여나, 누구의 요청이 아니라 헌법에 위배된다는 내 사명감으로 밀어붙인 일이에요.”
-MB의 대선을 도운 것으로 많이들 알고 있는데요.
“그랬다면 대선 직후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겠죠. 결과적으로 헌재가 신행정수도특별법에 위헌 결정을 하면서 MB의 정치행보에 큰 도움이 됐지만. 2007년 대선 때 나는 오히려 (세 번째 출마선언을 한) 이회창 당시 무소속 후보와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MB는 곧 다시 그를 찾았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으로 그를 지목한 것이다.
“2008년 2월 말인지, 3월 초인지 MB가 직접 전화를 했어요. 법제처가 아주 중요한 기관이니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사실 나는 굳이 법제처장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수락 의사를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 뒤 청와대가 발표를 하더군요.”
◇청와대 “이준기, 홍보대사 안돼”
법제처는 행정부의 입법 활동을 조정하고 법령을 심사하는 ‘조용한’ 기관이다. 그러니 법제처장도 그다지 기사를 몰고 다니는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석연의 법제처’는 달랐다. 그는 법제처장이 되자마자 기자간담회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주도했던 ‘과거 정권 인사 퇴진’ 요구를 두고 “법치행정에 맞지 않다”며 반대했다. “한나라당 논리로 집권했다고 그 논리를 고집하면 안 된다”며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석 달 뒤엔 큰 논란 거리였던 ‘쇠고기 고시’의 위헌성을 꼬집어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청와대는 조용했나요?
“공공기관장 임기 발언 때는 저도 비서한테 ‘각오하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아무 말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쇠고기 고시 때부터 청와대에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대통령령이나 부령으로 해야 하는데 장관 고시로 하는 건 법치주의에 위배되는 일이었어요. 그러니 내가 재야에 있었으면 헌법소원을 했을 사안이라고 말했죠.”
-MB의 반응이 있었나요?
“쇠고기 고시 때는 발언이 보도되기 전에 청와대에 가서 직접 대통령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토요일에 면담을 요청해서 20분 정도 잡혀 있었는데 1시간 반이 넘게 만나고 왔죠. 당시에 쇠고기 협상 때문에 촛불집회가 벌어지면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갈 때거든요. 그때 MB한테 두 가지를 건의했어요. 쇠고기 고시 철회와 (당시 여당 내 야당이었던) 박근혜 의원과의 화해. 그러고 나서 쇠고기 고시 위헌성을 지적한 내 말이 신문에 보도가 됐는데 그 뒤부터 견제가 시작된 듯한 느낌을 받았죠.”
예를 들면 이런 일이다. MB가 국무회의 참석자들과 산행을 한 뒤 청와대 뜰에서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할 때였다. 국무위원들에게 돌아가며 한 마디씩 권하는데, 유독 그에게는 ‘무슨 얘기가 나올 지 모르겠지만…’이란 뼈 있는 추임새를 넣었다.
“심지어 법제처 홍보대사 가지고도 청와대에서 말이 나왔죠. 배우 이준기, 김상경씨를 홍보대사로 위촉했는데 어느 날 국무회의가 끝난 뒤에 청와대 참모 중 하나가 ‘이준기는 빼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한 마디로 이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다는 거예요. 정말 황당했어요. 법제처 대변인실에 혹시 청와대에서 그런 연락이 오거든 무시하라고 얘기했죠.”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준기씨는 ‘MB 정부의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쇠고기 촛불집회’ 때 경찰의 강경 대응을 비판하고,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도 공개적으로 애도했다는 이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인권위 축소, 유일하게 반대
그래도 당시 법제처장 이석연은 소신 행보를 이어갔다. 이명박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축소하려 할 때 국무회의에서 참석자 중 유일하게 반대했다. 법리적 하자가 있을 뿐 아니라 타 기관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나 심한 후폭풍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소신발언에 당황한 한승수 총리가 서둘러 안건을 종결시켰다”고 안경환 당시 국가인권위원장은 회고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였던 이른바 ‘미디어법’(신문의 방송 겸영을 허용한 관련법) 시행령 개정안도 위헌성을 지적하며 제동을 걸었다. 법제처가 시행령을 심의하지 않으면 모법인 미디어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셈이어서 파장이 컸다.
“그만 둘 각오를 하고, 석 달 간 개정안을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가 뒀죠. 결국 고민하다가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긴 했어요.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 MB와는 애증의 관계랄 수 있겠네요. 직언하는 참모를 곁에 두지 않고 성공한 지도자는 없어요. 나는 ‘직언은 현직에 있을 때 하라’는 게 소신이에요.”
-청와대가 법제처장의 발언을 단속하려 했다는 문건이 나왔을 때 심경이 어땠나요.
“착잡했죠.”
그는 2010년 8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2년 반 재직한 뒤였다. 법제처장은 정해진 임기가 없다.
“임태희 당시 비서실장에게 ‘그간 애썼다’며 교체될 것 같다는 연락이 왔죠. 그 전에도 사의를 밝힌 적이 이미 있었고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었죠. 이임하는 날 저녁 대통령이 당시 교체된 국무위원, 기관장들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로 초대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그랬죠. 그간 정부에 쓴 소리를 한 이유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고민했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고요. 그러니 대통령이 혹시라도 언짢게 생각했다면, 내 이런 취지를 생각해 달라고요.”
그 뒤에도 청와대가 그를 찾은 일이 두 번 있다고 한다. “총리 후보를 물색할 때였는데, 당시 청와대 핵심 참모가 저를 1순위로 올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MB는 김태호 전 경남지사를 염두에 뒀죠.”
또 한 번은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다. “내가 출마 뜻을 접고 나서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한테 다급한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VIP가 통화를 원한다’고요. 여당 후보로는 나경원 의원이 확정됐을 때죠. 아마 대통령은 나 후보 지지선언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때 내가 아예 답신도, 연락도 하지 않았죠. 그때 굉장히 서운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김기춘 “총리 후보로 추천” 연락했지만
-지난 해 지방선거 때도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로 거명됐었죠.
“온 가족이 모두 출마를 반대했어요. 그때 군대 간 늦둥이 막내아들까지 휴가를 나와 가족회의를 소집했거든요. 집사람이 가장 강하게 반대했죠. ‘노욕 아니냐’면서. 진보, 보수 진영의 원로들도 두루 만났는데 반반으로 나뉘더군요.”
-문재인 정부 초기에 치러지는 선거라서 출마한다면 패배할 각오도 해야 했겠죠. 그러나 그걸 발판으로 한국당에 들어가 입지를 굳히고 정치를 시작할 수도 있고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고 계신 이종찬 전 의원이 그러더군요. 이를 계기로 정치를 시작할 생각이 있느냐고요. 없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그만 두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니라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조언을 하셨어요. 그게 큰 영향을 미쳤죠. 홍준표 대표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래서 고사했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나요?
“대선과 총선이 함께 있던 2012년, 측근 의원한테 연락이 온 적 있어요. 총선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거였죠(당시 새누리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 체제였다). 그런데 그때 제가 고사했어요. 그 뒤로 박근혜 정부 때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총리를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한 적이 있죠.”
-박근혜 정부 때도요?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에 정홍원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을 때죠.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직후였어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두 번 걸려왔기에 받았더니 김기춘 실장이었죠. 다급한 목소리였어요. 현 정부에 대한 생각, 병역 문제에 재산까지 이것저것 묻더니, 그러면 됐다고 하면서 개인정보 제공 동의서에 서명해서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총리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거였어요. ‘호남 출신 총리’ 구상을 하고 있는 듯 했죠. 그런데 며칠 뒤 청와대에서 정홍원 총리를 유임하겠다고 발표하는 걸 보고 대통령 뜻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 때 총리 할 생각이 있었나요?
“만약 한다면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겠죠. 총리의 책임과 권한을 보장해달라고. ‘이도사군 불가즉지(以道事君 不可則止)’라고 했어요. 도로써 군주를 섬기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는 거죠. 성공한 군주 옆에는 직언하는 참모가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예요. ‘사기열전’에도 ‘부지기군 시기소사(不知其君 視其所使)’란 말이 있죠. 그 군주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거든 그가 쓰는 사람을 보면 된다고요.”
◇이명박ㆍ박근혜 사면해야 국민통합
-공교롭게도 두 전직 대통령이 모두 구속됐죠.
“창피한 일이죠. 부패를 저질렀든, 국정을 농단했든, 국가의 품격을 생각하면 정말 창피하죠. 두 사람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에요.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내란, 외환죄도 아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아요. 두 사람 모두 형이 확정되면 문재인 대통령이 사면해야 한다고 봐요. 반대가 엄청 심할 테지만, 대통령이 결단해야 해요. 여론에 밀려서 사면을 결정한다면 의미가 없고요.”
인터뷰는 MB의 보석(보증금 등 조건을 내건 석방) 결정이 있기 전 이뤄졌지만 그는 조심스레 보석 허가를 예상하기도 했다. 9일로 만료되는 구속기한 안에 선고가 어렵다는 점, 방어권 보장 등을 고려했을 때 그럴 수 있다는 얘기였다. 실제 재판부는 이런 점을 이유로 MB를 조건부 석방했다.
-이 정부의 근간인 촛불정신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올 텐데요.
“40, 50%에 달하는 중도보수층이 촛불을 들지 않았다면 촛불혁명은 실패했을 거예요. 이들의 공통적인 정서를 고려해야 해요. 나 역시 ‘박근혜 탄핵’ 때 헌법에 비춰 파면이 가능하다고 했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을 늙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게 촛불혁명의 완성은 아니잖아요? 사면된다고 해도 이미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는 없어요. MB가 받는 ‘다스 소송비 대납’ 같은 혐의도 모두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일이죠. 문 대통령이 ‘집권하면 정치보복’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해요. 사면은 국민통합으로 가는 최소한의 조치죠.”
-한국당에서도 사면론이 나왔죠.
“당내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략적인 주장과는 달라요.”
-한국당 상황은 어떻게 보나요?
“지금도 친박, 비박에 얽매여있죠.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소리가 나오죠. 대표로 선출된 황교안 전 총리는 탄핵의 절차가 잘못됐다는 주장이나 하고요. 진짜 그랬다면 대통령 권한대행 할 때이니 잘못을 지적했어야죠.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니 소가 웃을 일이에요. 탄핵 과정은 정당했어요. 보수가 궤멸됐다고 하는데, 보수세력은 궤멸되지 않았어요. 합리적인 중도보수 세력이 보수답지 않은 보수 정권, 지도자를 무너뜨린 거죠.”
-한국당이 중도보수층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요?
“한국당으로는 총선, 대선 모두 안 돼요. 의원들이 개혁에 관심 있나요? 어디로 줄 서야 재선, 삼선될까 하는 데만 몰두해 있겠죠. 한국당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도록 해야 해요.”
-새로운 보수 세력이 출현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우선 나는 정치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런 전제로 말하자면, 온정적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나와야 한다고 봐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확고하게 견지하되, 약자를 위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채택해야 진짜 보수죠. 정치에 물들지 않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중도보수 인사들이 참여하는 포럼을 구상하고 있어요. 한국당이 보수 유권자를 대변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현 정부의 위헌성, 편향성, 독선적 행태도 비판할 거예요.”
-신당을 추진한다는 건가요?
“새로운 형태의 국민참여 운동이라고 할까요.”
-창당을 목표로 해야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국민에게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하는 거죠. 물론 잘 돼서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 헤리티지 재단 같은 싱크탱크나, 정치세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바라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국회의원 하라는 권유를 받은 적도 있나요?
“공천 주겠다는 제안도 여러 번 받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정치할 생각이 없거든요. 개인 성명을 낸 적도 있죠.”
-정치도 세상을 바꾸는 주요한 기제인데, 왜 할 생각이 없나요?
“시민운동으로 더 큰 메아리를 오게 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국회에 들어가면 ‘원 오브 뎀(one of them)’ 아닌가요? 그간 국회 밖에서 의원 몇 십 명 몫만큼 활동을 했다고 생각해요.”
-정치 성향으로 따지자면 보수겠죠?
“지금도 나를 진보진영에서는 ‘보수 꼴통’이라고 하고, 극우층에서는 ‘위장 보수’라고 하죠. 나는 헌법적 자유주의자일 뿐이에요.”
◇문재인 대통령도 “함께 가자” 요청
-문 대통령이 혹시 도와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나요?
“집권한 뒤에 연락 온 적은 없어요.”
-그 전에는 있어요?
“대선 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 메모해둔 걸 보니 2017년 2월 19일이네요. 헌재의 탄핵 결정이 있기 전이라 대선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국면이었죠. 당시 문재인 후보를 돕던 측근 의원이 후보가 급히 보기를 원한다면서 찾아왔어요. 그래서 만나기로 한 게 그 날이죠. 문 대통령이 간곡히 부탁한다면서 ‘같이 가봅시다’라고 했죠. 그때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개헌의 방향이나, 헌재의 탄핵 결정 예측, 안보 문제까지. 그런 뒤 캠프에서 공식적으로 합류 사실을 발표하는 날짜까지 정해서 알려줬죠. 그런데 그 이후로도 세 차례쯤 미뤄지더군요. 그래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대선까지 관여하지 않았어요. 친문 쪽에서 반대하지 않았을까 예상만 했죠.”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 문재인 후보를 왜 도우려 했나요?
“나 역시 박근혜 정부의 독선, 불통 또 보수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적인 행태에 염증을 느꼈거든요. 문 대통령을 만났을 때 통합의 리더십으로 가야 한다고 요청했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합류하기로 마음 먹었죠.”
-그 뒤로 대통령에게서 연락은 없었나요?
“전혀요. 그래서 당시 함께 가자고 했던 진의가 의심되기도 했죠.”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집권 세력이 오만에서 벗어나야 해요. 자신들만이 정의를 독점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이렇게 가다가는 정의가 적폐의 동의어가 될 수 있어 걱정스러워요.”
큰 그림 얘기를 충분히 듣고 나니, 그가 그리는 작은 그림도 궁금해졌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언제 가장 행복한가요?
“(미소) 글쎄요. 음, 혼자 조용히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단상을 글로 쓸 때요. 그래서 지금도 한 달에 두, 세 번은 일부러 도시락을 싸와서 사무실에서 먹어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밥을 아주 천천히 씹어먹으면서 책도 읽고 사색도 하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를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책과 더불어 간다. 그래서 모험도 했고 도전도 할 수 있었죠. 돌출 행동을 한다거나, 삐딱하다는 비난도 받았어요. 하지만, 책 속의 지혜와 함께 했기 때문에 일시적인 시행착오는 겪었을지 모르지만, 바른 길을 걸었다고 확신해요.”
그는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가 아닌 인류의 경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구절을 들었다. ‘이장군전’의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ㆍ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다. 덕이 있는 사람은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살면서 욕심을 비웠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내게 욕심이 있다면,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사회에 봉사하고 싶다는 거예요. 나이 들며 ‘도리불언 하자성혜’ 할 수 있는 원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죠.”
그의 욕심이 이뤄진다면, 10여 년쯤 뒤 우리 공동체는 또 한 명의 존경 받는 원로를 가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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