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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000통의 인연… 아버지-아들이 된 대법관과 사형수

입력
2019.03.23 09:00
수정
2019.03.23 10: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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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정수씨 28년 전 친척 부부 살해, 사형선고 받고 가톨릭 귀의ㆍ참회 

 2심 무료변론 변호사에 매주 편지… 양아버지 돼준 변호사는 대법관으로 

 출소 후 운구차 기사로 일하며 봉사… 양아버지, 퇴임 후 후학 양성 

사법심판대 양 극단에 앉았던 사형수와 대법관은 27년을 교류하며 양아들과 양아버지가 됐다.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영락없는 부자의 모습이다. 홍인기 기자.
사법심판대 양 극단에 앉았던 사형수와 대법관은 27년을 교류하며 양아들과 양아버지가 됐다.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영락없는 부자의 모습이다. 홍인기 기자.

 #1. 죄와 벌 

“피고인 배정수(가명)를 사형에 처한다. 탕탕탕.”

명치 끝에서 어지러움이 일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서른두 살 청년의 세계는 법봉 아래 산산조각 났다. 삶도, 꿈도, 미래도 재판장의 주문과 함께 사라졌다. 만약 그날 아저씨 댁에 가지 않았더라면, 도박 빚을 지지 않았더라면, 아저씨께 옛날 일을 들먹이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대들지만 않았더라면.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 소용 없는 가정이 스치고 지나가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빨간 벽돌집. 30m쯤 떨어져 있는 저 곳이 대구교도소 사형장이라고 수감자들이 귀띔했다. 하늘에서 두꺼운 밧줄이 내려오고 바닥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꺼지는 꿈을 이 곳에 온 뒤로 매일 꾼다. 1992년 벚꽃이 쏟아지던 늦봄,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이다.

그 놈의 도박이 시작이었다.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인 친척 아저씨에게 빌린 800만원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돈 갚을 때가 되자 아저씨를 찾아가 보증금 1,000만원에서 빌려준 돈을 갈음해달라고 떼를 썼다. 언성이 높아졌고 아저씨도 흥분했다. ‘첩의 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면 잘 살라고 꾸짖었다. “존경받는 교육자가 고인께 누가 되는 말씀을 하시냐”라며 대들었다.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과거 언짢은 일들이 소환됐고 다툼은 거칠어졌다. 훈계하던 아저씨 오른손에 쥐여 있던 과도가 내 뺨을 스쳤다. 뜨거운 피가 흘렀다. 크고 사나운 내 손은 통제력을 잃고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91년 대구 교장부부 살인사건’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91년 대구 교장부부 살인사건’이라 불렀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사람들은 이 사건을 ‘91년 대구 교장부부 살인사건’이라 불렀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검사가 속사포처럼 낭독하는 혐의는 누가 들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 쓰레기의 당연한 말로였다.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1992년 4월 26일. 나의 이름은 이날부터 사형수였고, 누구도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무료변론을 맡은 인연으로 옥중 18년(2010년 2월 가석방) 동안 내 손을 놓지 않은 양아버지만이 예외였을 뿐이다. 세상이 내 양아버지를 부르는 이름은 대법관, 내가 그를 부르는 이름은 구원자였다.

 #2. 인연의 시작 

“신부님이 법원엔 무슨 일이세요.”

1992년 4월 26일. 법원 건물을 나서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신부님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중앙 문을 나서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자신이 영세를 준 신자가 오늘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단다. 매일 참회하는 편지를 쓰고 눈물로 뉘우치고 있다고 했다. 살인사건 이후 잠적했었지만, 피해자 가족이 용의자로 몰리자 갈등하다 자수했다고 한다. 다른 일로 수사를 받다가 형사의 묵주가 홀연히 빛나는 것을 보고 모든 죄를 털어놨다는 게 신부의 설명이었다.

“내가 변호사니 항소심에서 무료로 변론을 맡아 도울 수 있는 대로 돕겠습니다.” 그렇게 신부님을 안심시키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형수 배정수, 아니 내 양아들 배정수의 인생이 내게 들어온 날이다.

“신부님이 법원엔 무슨 일이세요.” 1992년 4월, 법원 건물을 나서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신부님이 법원엔 무슨 일이세요.” 1992년 4월, 법원 건물을 나서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사형수와 대법관. 사법심판대 양 극단에 앉은 두 사람. 이 기사는 어느새 27년에 달한 인연을 나눈 두 남자의 굽어가는 뒷모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참혹한 죄를 지은 사형수 배씨가 감형과 가석방을 거쳐 18년 만에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오기까지 전직 대법관 배씨는 자비로운 교화자, 그리고 아버지였다.

 #3. 살인자의 편지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 카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노신사는 모자 가운데를 눌러 쓰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았다. 말끔한 정장 차림이다. 테이블 위에는 묵직한 물건이 든 종이가방을 부려놓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찻잔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노신사는 종이가방을 기자 쪽으로 슬며시 밀며 입을 열었다. “그걸 내가 모아가지고 대구에 살면서 일부 짐을 어디 시골에 좀 옮겼는데 그게 마, 송두리째 없어졌어요. 어제 전화를 끊고 찾아보니 대법원에 있을 때 비서가 철해놓은 게 남아있더군요. 5년치 될 겁니다.”

종이가방엔 웬만한 족보만큼 두꺼운 문서 한 뭉치가 들어있었다. 바랜 하늘색 표지를 넘기자 2000년 7월 16일부터 2005년 11월 20일까지 매주 일요일 배정수씨가 보낸 편지가 빠짐없이 편철돼 있다. 한 주를 돌아보며 적어 내려간 사형수의 편지. 오른쪽 위로 기울여 쓴 글씨체는 바닥까지 반듯했다. 노랗게 변색된 편지지에는 배씨의 교도소 안 삶이 빠짐없이 담겼다. 사형을 선고 받은 범죄자의 절망과 불안,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신에게 고하듯 써 내려갔다. 반성으로 시작된 글은 점차 신을 향한 찬미, 속죄와 참회, 교도소 일상을 담은 빼곡한 기록이 되어 있었다.

바랜 하늘색 표지를 넘기자 2000년 7월 16일부터 2005년 11월 20일까지 매주 일요일 배정수씨가 보낸 편지가 빠짐없이 편철돼 있다. 한 주를 돌아보며 적어 내려간 사형수의 편지. 이한호 기자
바랜 하늘색 표지를 넘기자 2000년 7월 16일부터 2005년 11월 20일까지 매주 일요일 배정수씨가 보낸 편지가 빠짐없이 편철돼 있다. 한 주를 돌아보며 적어 내려간 사형수의 편지. 이한호 기자

 #4. 양아버지의 답장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참혹한 범죄였지만, 요아킴(배정수씨 세례명)은 인생을 바꾸는 계기로 삼았다. 내 양아들의 수감생활은 수사(修士)의 삶과 같았다. 보통은 선고가 나면 변론한 사람을 잊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아킴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매주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18년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살고 있다면서 일주일 간의 삶을 세세하게 적어 보냈다. 자꾸 편지를 받다 보니 한 달에 한번쯤은 나도 답장을 하게 됐다.

 #5. 아버지라 불렀다 

붉은색 명찰을 가슴에 단 나는 매일 간절히 기도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 형을 집행해준다면 좋겠노라고.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고 매일같이 되뇌었다. 생명을 파괴한 범죄자에게 마땅한 벌일 것이다. 영원 같은 한 달을 불안으로 보냈다. 면회를 온 아내는 한 달 전보다 더 말라있었다. “아직 2심 선고가 남았으니 희망을 잃지 말아요.” 앙상한 뼈가 드러난 아내가 웃었다. 그러나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사형장의 악몽은 결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일러주었다.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눈물 콧물 쏟아내며 매일 참회기도를 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눈물 콧물 쏟아내며 매일 참회기도를 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절망의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신입 수감자가 들어왔다. 식사 전 성호를 긋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신입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기도문들은 한 번에 외우기엔 꽤 많았다. 두 생명을 빼앗고, 그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살인범에게 법은 종이와 연필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유를 마신 뒤 종이 곽을 씻어 말려 종이를 대신했다. 주스 곽 안쪽 은박지는 뾰족하게 만들어 연필로 삼았다. 마른 종이 위에 기도문을 적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내려갔다. 하룻밤 만에 주요 기도문을 다 외웠다. 눈물 콧물 쏟아내며 매일 참회기도를 했다.

2심 선고를 앞두고 변호사가 자주 면회를 왔다. 변호사는 짧은 시간에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한 나를 보고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내 편이 되어준 변호사가 내 아버지였으면’ 하고 상상해봤다.

일요일 밤, 한주간의 삶을 변호사에게 털어놓는 게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살인범의 편이 되어 나를 변호해준 조력자라면, 어쩐지 나를 무작정 혐오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리고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 희망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내 삶을 차츰 끌어올렸다. 2장짜리 편지 말미엔 늘 공간이 모자라 글씨가 깨알처럼 작아졌다. 끝자락에 “아버님을 사랑하는 대자(代子) 요아킴 배상(拜上)”이라고 슬그머니 적어보았다.

1992년 8월 10일. 어느새 내게도 일상이란 게 생겼다. 여느 날처럼 기상시간에 일어났고 배식을 뜨고 아침을 먹었다. “둘둘둘오(2225ㆍ수인번호), 출정 준비 하시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내 머릿속은 불길한 예감과 기적을 바라는 희망이 교차했다. ‘선고일은 다음주 수요일인데…’ 아직 사형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오늘 집행할 리는 없었다. 기적을 바라며 출정 준비를 했다.

 #6. 회생 

몇 달 새, 요아킴이 달라졌다. 죄를 지었지만 새사람이 된 것 같았다. 법원에서 한 번만 온정을 베풀어주면, 한 번쯤 사형을 면해주면 새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교도소에서 자기를 지도하는 수녀님에게 쓴 편지, 영세를 준 신부님한테 쓴 편지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 2심 선고를 일주일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 인사가 나 재판부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통상 선고기일 전에 인사이동이 있으면 재판장은 사건을 후임 판사에게 넘기는 것이 관례다. 재판장은 관례와 달리 이 사건을 매듭짓고 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원심을 파기하고 피고인 배정수를 무기징역에 처한다. 탕탕탕.” 양아들이 죽음의 형벌에서 벗어났다.

무기수가 된 배씨는 교도소에서 새 삶을 사는 자신의 일상을 상세히 적어 편지를 보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무기수가 된 배씨는 교도소에서 새 삶을 사는 자신의 일상을 상세히 적어 편지를 보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7. 편지지에 실려 보낸 세월 

노신사는 편지 사이사이에 끼워둔 상장을 기자에게 들춰 보이며 말했다. “이래 붙여가 보냅니다. 감방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무슨 장(長)을 맡아 잘 하고, 옆에 어려운 사람 배려하고 낱낱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안 만나도 사는 모습이 훤합니다. 편지를 보면 1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요.”

무기수가 된 배씨는 시를 많이 썼다. 2001년 4월 천주교 서울대교구 종교행사에서 발표한 봉헌시를 동봉해 보냈고, 이듬해와 2003년엔 교도소 내 백일장 행사에서 입상해 받은 상장을 복사해 편지에 부쳤다. 교정문예작품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한 상장, 교도소 체육대회 테니스 종목에서 우승한 소식,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와 국가공인 한자1급 시험에 응시해 합격증을 받은 사연까지 모두 편지에 담겼다.

 #8. 대법관이 된 아버지 

요아킴이 일요일에 부친 편지는 수요일에 나에게 도착했다. 1,000여통 편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각자의 신분도 달라졌다. 무기수이던 그는 2003년 광복절 특사를 받아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나는 그의 양아버지가 되었고, 대법관이 되었다. 15년치 편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내가 대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도착한 편지는 비서가 빠짐없이 철을 해준 덕택에 남아있었다.

대법관으로 재직 중 요아킴이 있는 관내 법원에 재판감사를 나가거나, 반대로 요아킴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 있는 교도소로 와 있을 때 몇 번 그를 찾아가 만난 일이 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날엔 영치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큰절을 한다. 아버지라고도 불렀다. 특별히 양아들 삼기로 한 것은 아닌데 교도소에 갈 때마다 그렇게 부르기에 나는 나무라지 않고 받아들였다.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만난 배기원 전 대법관은 편지 사이사이에 끼워둔 상장을 기자에게 들춰 보이며 말했다. “이래 붙여가 보냅니다. 감방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무슨 장(長)을 맡아 잘 하고, 옆에 어려운 사람 배려하고 낱낱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안 만나도 사는 모습이 훤합니다. 편지를 보면 1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요.” 홍인기 기자
1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만난 배기원 전 대법관은 편지 사이사이에 끼워둔 상장을 기자에게 들춰 보이며 말했다. “이래 붙여가 보냅니다. 감방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무슨 장(長)을 맡아 잘 하고, 옆에 어려운 사람 배려하고 낱낱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안 만나도 사는 모습이 훤합니다. 편지를 보면 1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요.” 홍인기 기자

 #9. 시인, 운전기사, 특강강사 

2010년 2월, 형기를 2년쯤 남기고 나는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출소 후 맞서야 할 사회의 공기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었다. 교도소에서 참회하며 보낸 18년이 옛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사실은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할 숙제였다. 수감기간 생긴 공백기를 설명하다 보면 취직이 쉽지 않았다. 나 출소자 배정수(59)는 이제 월간 국보문학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무지개 출장광택 대표, 그리고 상조회사 운구차 기사로 살고 있다. 법무부 교정기관과 천주교회에 ‘죽음과 절망을 극복하는 행복’ 주제로 150회 이상 강연한 특강강사이기도 하다.

 #10. 모든 수형자가 그렇지 않다 

양아들은 나를 은인이라 부르지만 그를 변화시킨 건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였다. 처음 사형수를 만나면 당연히 편견을 갖게 마련이다. 어떤 계기로 사람을 접하다 보면 그의 진심을 알게 된다. 출소자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하고, 또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러면 상대도 문을 열게 돼 있다. 형을 18년 살고서도 사회에서 이렇게 적응을 잘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우리나라 기결수로서 손에 꼽힐 거다.

포용을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수형자가 아니라도 서로 마음 놓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양아들은 주님 품 안에서 기쁘게 사는 모습을 항상 전하고 느끼게 한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요아킴을 그렇게 대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안타깝게도 모든 수형자가 다 그렇지는 않다. 사회나 이웃에 대해 옛날 일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사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게 현실이다. 결국 자기 하기 나름 아닐까.

9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 장애인복지시설 둘다섯해누리에서 출소자 배정수(가명)씨가 악기연주를 하고 있다. 이 곳에서 2년 넘게 지낸다는 한 청년은 "배씨가 자주 와서 연주를 하는데 나는 노래를 좋아해 무대에도 자주 올라간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9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 장애인복지시설 둘다섯해누리에서 출소자 배정수(가명)씨가 악기연주를 하고 있다. 이 곳에서 2년 넘게 지낸다는 한 청년은 "배씨가 자주 와서 연주를 하는데 나는 노래를 좋아해 무대에도 자주 올라간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11. 참회, 다시 참회 

나는 지금도 참회하며 살아간다. 출소 후 피해자 유족들을 세 차례 찾아갔지만 번번히 문전박대를 당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어이없게 잃었으니 나를 향한 분노가 풀리지 않은 게 당연하다. 가톨릭대병원을 찾아 시신ㆍ장기기증 희망자로 등록했다. 한 달에 나흘뿐인 휴일을 중증장애인시설에서 악기연주 봉사를 하며 보낸다. 교도소 좁은 화장실에서 입술이 부르트도록 익힌 하모니카로 성가와 유행가를 연주한다. 색소폰을 불기도 한다. 유족들에게 사죄할 수 없다면 주변의 이웃에게 봉사하며 사는 게 ‘덤으로 주어진 새 삶’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겨서다.

2013년 10월, 내 이야기는 ‘행복한 사형수(국보 발행)’로 출간됐다. 절망 속에 15척 높은 담 안에 살고 있는 힘겨운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싶었다. 책을 내라는 주위의 권유도 있었다. 다만 죄인의 이름을 보게 될 유가족들이 마음에 걸렸다. 형법으로 죄의 대가는 치르고 나왔지만 피해자들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으니까. 또다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드러내자 양아버지가 자신의 성을 주며 배정수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출소자 배정수(59)씨는 이제 월간 국보문학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무지개 출장광택 대표, 그리고 상조회사 운구차 기사로 살고 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출소자 배정수(59)씨는 이제 월간 국보문학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무지개 출장광택 대표, 그리고 상조회사 운구차 기사로 살고 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12. 아버지와 아들로 늙어가다 

주변인들에게 배씨는 어떤 모습일까.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 밖 배씨 모습이 궁금했다. 9일 경기 화성시 중증발달장애인시설 둘다섯해누리에서 그의 동료들을 만났다. 배씨와 악기연주 봉사를 다니는 무지개기획사 단원들은 출소자에 대한 편견을 갖기 전 그를 알게 됐다. 악기연주 동호회에서 만나 3년째 호흡을 맞췄다. 함께 재능기부할 곳을 찾아 다니고 배씨가 단원들을 챙기는 모습을 먼저 봤기에 나중에 배씨의 과거를 알았을 때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 동호회에서 만났을 땐 옛날 일을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형님이 ‘행복한 사형수’ 책을 선물해줘서 읽어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책에 담긴 성찰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무서운 생각은 들지 않게 되었지요.”

10일 갑작스럽게 이뤄진 배 전 대법관과의 인터뷰 소식을 알리자, 충북에서 장례일을 마친 배씨가 운구차를 몰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수화기 너머 배씨에게 “어디쯤이냐” 하고 묻는 노신사의 허물없는 말투가 다정하다. 신기한 듯 바라보자 “2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라고 답한다.

배씨는 운구차 운전기사 일이 천직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장례 의식을 챙기며 수십 킬로미터를 다니는 고된 일이지만 매일 죽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인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죄로 세상을 떠난 아저씨, 아주머니께 사죄한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28년 전 자신과, 18년 넘는 옥바라지에 두 딸을 키우는 고생만 하다가 자신이 출소한 지 2년 만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린다. 오늘 이 순간을 허투루 살 수 없는 이유를 이를 악물며 깨닫는다.

요아킴은 만날 때마다 배 전 대법관을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큰절을 한다. 아버지라고도 불렀다. 특별히 양아들 삼기로 한 것은 아닌데 교도소에 갈 때마다 그렇게 부르기에 나무라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요아킴은 만날 때마다 배 전 대법관을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큰절을 한다. 아버지라고도 불렀다. 특별히 양아들 삼기로 한 것은 아닌데 교도소에 갈 때마다 그렇게 부르기에 나무라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양아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던 노신사는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묻자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절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오늘은 요아킴과 둘이 저녁을 먹는 게 좋겠다”며 기자와의 저녁식사 약속도 털어버리고 자릴 떠났다. 노신사는 배기원(79) 전 대법관이다.

배 전 대법관은 2005년 퇴임한 뒤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2015년 기자가 배씨 사연을 처음 접하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배씨를 통해 간곡히 거절 의사를 전했었다. 2017년 70대인 배 전 대법관이 서초구청에서 매주 화요일 무료법률봉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재차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도 그랬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이유를 물으니 “괜히 이름 오르내리는 게 번거로워서 안 한다”고 했다. “대법관을 임명할 때 보수냐 진보냐의 잣대로 법관을 평가하는 방식에 우려하는 뜻을 내비친 퇴임 인터뷰가 내 기억에 유일하다”고 덧붙였다.

변호사로 개업하는 대신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서초구청에서 무료법률상담을 해 후배 법조인들에게 귀감이 됐다.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에게 거액을 주고 도장을 받아 상고이유서를 제출하는 이른바 ‘도장 값’ 관행이 사법신뢰를 해친다는 재야 법조계의 지적이 만만치 않던 시절이다.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니 영락없는 부자간의 몸짓이다. 배씨는 양아버지의 걸음이 오르막에서 느려지자 팔을 뻗어 등을 밀어주었다. 사형수와 변호인, 무기수와 대법관,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로 늙어가는 두 남자의 그림자가 멀어지며 하나가 됐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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