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는 알곡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젖을 갈아 낸 가루이다. 단백질 함유량에 따라 박력, 중력, 강력분으로 나뉜다. 각각 부침개나 쿠키, 만두나 수제비, 피자를 비롯한 빵을 만드는 데 쓴다. 단백질의 정체는 글루텐으로 밀가루의 글루테닌과 글루아닌이 물과 만나 결합하면, 즉 반죽을 하면 형성된다. 사슬 구조를 형성해 밀가루 음식의 탄성, 말하자면 우리가 좋아하는 쫄깃함을 자아낸다.
과학적 사실을 살펴보고 나면 밀가루가 시달리는 오명 혹은 누명이 기다리고 있다. 쌀에 비해 건강에 나쁜 식재료이다(과학적으로 보면 똑같은 탄수화물이다), 소화가 잘 안 된다(빵을 비롯한 밀가루 음식을 설익히는 경향이 있다) 등, 쌀 식문화권의 평화를 깨는 불청객처럼 취급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는 탄수화물의 절반으로서 밀과 그 가루 또한 삶과 생명의 상징이다. 게다가 쌀에는 글루텐이 없는 탓에 쫄깃함은 밀가루로만 낼 수 있다. 이래저래 우리는 1인당 밀가루를 1년에 33.2㎏(2016년 기준) 소비한다. 라면부터 부침개, 만두, 국수, 수제비까지 한국의 식문화도 사실 밀가루에 많이 의지한다.
밀가루로 온갖 음식을 만들 수 있지만 상징은 효모를 쓰는 발효빵이다. 효모가 밀가루의 당을 먹고 일을 해서 만들어낸 이산화탄소가 반죽을 부풀리는 한편 깊은 맛도 깃들여 인류의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발효빵은 집에서 시도하기에 너무 까다롭고 복잡한 공정이 아닐까. 밀가루와 물, 효모, 소금 등의 재료를 섞어 반죽하기도 힘이 들고 효모는 미생물이니 온ㆍ습도에 민감해 발효의 진척을 계속 관찰해야 하며, 무엇보다 오븐이 없으면 반죽을 구울 수도 없다.
제빵은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공정으로 인식되다가 십여년 전, 변화의 파도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그 파도의 이름은 ‘무반죽 빵(no-knead bread)’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제빵사 짐 레이히가 처음 고안했고, 2006년 뉴욕타임스의 요리 연구가 마크 비트먼이 기사화해 퍼졌다. 발효 이후에는 여느 빵처럼 나누기 및 모양 잡기를 반드시 거쳐야만 하니 엄밀히 말하자면 98%쯤 무반죽이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반죽용 믹서를 돌려온 지 어언 15년, 웬만하면 빵을 자급자족해 보려고 애를 써온 입장에서 무반죽 빵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손이 덜 간다. 무엇보다 밀가루와 물을 더해 반죽을 치대야 하는 고되고 지난한 초기 과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치댈 필요 없는 무반죽 하는 법
그런데 치대지 않고 어떻게 반죽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핵심은 높은 수분의 비율과 긴 발효 시간, 두 가지이다. 높은 수분으로 인해 묽은 편에 속하는 반죽을 긴 시간 두면 알아서 척척 반죽과 발효를 해낸다. 밀가루와 물, 소금 등을 한데 담아 가볍게 섞어 준 뒤 그대로 상온에서 12~18시간 두기만 하면 되므로 손이 거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오븐을 갖추지 않았다면 구울 수 없으니 반죽 만들기가 아무리 쉽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꼭 그런 건 아니니 일단 걱정일랑 접어두고 집에서도 두루두루 만들어 쓸 수 있는 다목적 발효 반죽을 한번 살펴보자.
밀가루(강력분, 575g), 물(400g), 소금(12g), 효모(1g, ½작은술)의 기본 재료를 준비한다. 제빵에서는 언제나 밀가루와 물의 비율이 가장 중요하다. 밀가루를 100이라 잡을 때 나머지 재료의 비율을 ‘제빵사의 백분율(baker’s percentage)’이라 일컫고 척도로 쓰니, 비율만 맞춰주면 반죽을 얼마든지 적게 혹은 많이 만들 수 있다. 다목적 반죽의 경우 400/575=69.57이니 밀가루 100: 물 70, 즉 밀가루 대비 물을 70%로만 맞춰주면 같은 물성의 반죽을 언제나 만들 수 있다. 한편 소금은 밀가루 기준 2%이며, 효모는 0.2% 안쪽으로 소량이니 한두 자밤 정도 적당히 더해도 발효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반죽의 부피가 두 배 이상 늘어나므로 넉넉한 크기의 용기에 밀가루, 소금, 효모 등 재료를 담고 포크 등으로 잘 섞은 뒤 물을 붓는다. 고무주걱(스패출라)이나 손으로 최소한으로 뭉칠 때까지만 가볍게 섞어준다. 여기까지 준비하는 데 빠르면 2분, 늦어도 5분 이상 걸리지 않는다. 사진으로 보듯 ‘뭔가 아닌 것 같은’ 몰골이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테니 걱정일랑 덜어두고 랩을 씌우거나 뚜껑을 덮어 실온에 12~18시간 그대로 둔다. 그리고 빵 반죽에 손댄 적이 없는 것처럼 잊고 일상을 산다. 반죽도 만드는 이의 지나친 관심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굳이 중간에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목표 시간에 이르면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발효라는 대과업을 이룩해낸 반죽의 상태를 확인한다. 열 몇 시간 전 ‘이건 아니다’ 싶은 반죽이 ‘이거다’ 싶은 상태로 한껏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밀가루를 살짝 두른 도마 등 작업대 위에 반죽을 쏟고, 역시 밀가루를 두른 손으로 반죽을 가볍게 만져 둥글게 모양을 잡아준다. 이제 맛과 부피를 해결해주는 1차 발효가 끝났으니 바로 2차 발효에 착수한다. 반죽을 원하는 크기로 나누어 다시 한 번 둥글게 빚은 뒤 랩을 씌워 상온에서 한 번 더 발효시키는 공정이다. 요즘처럼 다소 쌀쌀한 봄이라면 실내 온도 21도를 기준으로 1시간 30분~2시간이 걸린다.
◇피자와 식사빵 등으로 무한 활용
이제 비밀(?)을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이 반죽은 원래 피자 도우이다. 하지만 많은 빵이 4대 기본 재료, 즉 밀가루, 물, 소금, 효모로만 만든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최종 결과물이 굳이 피자가 될 필요는 없다. ‘다목적 반죽’이라 일컬었듯 이후의 과정은 쓰임새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다. 만약 오븐이 있고 제과제빵에 관심이나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원하는 크기로 나눠 원하는 모양을 잡아 구워 소위 ‘식사빵’, 즉 단맛이나 지방이 없어 간식이 아닌 끼니로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 밀가루와 물을 더한 양이 곧 반죽의 총량이므로 1㎏이니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에 모자람이 없다. 반죽의 원래 정도를 진지하게 걸어 피자를 굽고 싶다면 성인 1인분인 250g으로 4등분한다. 반죽을 손이나 밀대로 지름 30㎝로 펴거나 밀어, 토마토 소스 및 원하는 치즈와 고명을 얹어 230도로 30~45분간 뜨겁게 예열한 오븐에 7~10분 굽는다.
설사 오븐이 없더라도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전혀 없다. 호떡 반죽과 비슷하니 얼마든지 팬에 구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팬을 가지고 있다면 가지고 있는 피자처럼 크게 만들어도 좋지만, 보관 및 재가열이 쉽도록 반죽을 125g으로 반죽을 8등분한다. 언제나처럼 저울을 쓰면 정확하고 효율적이지만 눈대중으로 나눠도 문제없다. 반죽은 밀대로도 펼 수 있지만 강력분으로 만든 덕분에 탄성이 강해 펴도 조금씩 다시 쪼그라든다. 따라서 차라리 손을 쓰는 게 그야말로 손쉽고도 속 편하다.
반죽을 도마나 작업대에 올리고 양손의 검지와 중지로 가운데부터 바깥으로 나가며 차분히 꾹꾹 누른다. 적당히 납작해졌다면 양손 엄지와 검지로 반죽 가운데를 집어 들고 나선형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조금씩 늘려 편다. 반죽이 발효 과정을 건실하게 거쳤다면 찢어지지 않으면서도 종잇장처럼 얇게 손으로 펼 수 있다. 얇은 나머지 반대 면이 비쳐 보일 정도라 ’창유리 테스트(window pane test)’라 일컫고 제빵에서 실제 지표로 활용한다. 만약 손으로 늘려도 반죽이 저항한다면 적당히 늘리다가 작업대에 1, 2분 놓아둔다. 글루텐이 안정을 되찾을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사이 반죽이 안정을 되찾아 덜 저항한다. 이렇게 반죽을 살살 달래가며 지름 10~15㎝로 납작하게 편 뒤 기름을 살짝 둘러 중불에 달군 프라이팬에 각 면을 2, 3분 굽는다.
◇남은 반죽은 냉동하고, 설거지는 찬물로
너무 잘 만들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다목적 반죽의 미덕이다. 가장 중요한 발효는 시간이 해결해 주고 이후의 과정에서도 아름다움이나 똑 떨어지는 완성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2, 3분 구우라고 제안했지만 당장 먹을 게 아니라면 상태를 보아가며 좀 덜 익혀도 전혀 상관없다. 가열로 일단 겉면의 모양이 잡히고 나면 냉동보관과 재조리 및 재가열이 아주 손쉽기 때문이다. 적당히 구워진 반죽을 완전히 식힌 뒤 차곡차곡 포개 냉동보관용 지퍼백에 담으면 일단 3개월은 두고 먹을 수 있다. 먹을 때에는 처음 구운 상태에 따라 다시 한번 익히는데, 토스터에 굽는 게 가장 편하며 간편한 아침 식사로 식빵 대신 활용할 수 있다. 긴 발효로 맛이 충분히 들었으니 버터나 올리브기름, 크림치즈 등을 찍거나 발라 먹으면 충분하지만, 만일 반죽이 못 다 이룬 피자의 꿈에 도전하고 싶다면 프라이팬에 올려 토마토 소스와 좋아하는 고명을 얹고 치즈를 올려 녹을 때까지만 구워주면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피자에 굉장히 근접한 빵을 먹을 수 있을뿐더러 토르티아보다 훨씬 튼실하고 맛도 좋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요리는 정리와 설거지까지 마쳐야만 끝나는 과정이다. 따라서 부침개든 팬케이크이든 납작빵이든 부치고 구운 뒤 그릇과 도구를 닦아야 하는데, 밀가루를 다루었다면 반드시 찬물로 씻어야 한다. 밀가루 반죽이 끈적거리니 따뜻한 물에 녹여서 씻어내야 할 것 같지만, 물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더더욱 끈적거려 골치만 아파질 뿐이다. 다목적 반죽처럼 밀가루 대비 물의 비율이 높을수록 반죽이 더 흐물거리거나 끈적거리므로 말끔한 설거지가 어려울 수 있는데, 그릇과 도구를 한 번 완전히 말려 굳은 밀가루를 긁어 털어낸 뒤 찬물을 부어 불리면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반죽 나눌 때는 ‘도우 디바이더’
빵 반죽은 빵칼로 다루는 게 가장 편하다. ‘칼’이라고 했지만 정식 명칭은 ‘도우 디바이더(dough divider)’, 즉 반죽 나누개다. 일반 식도보다 ‘날’이 조금 더 두꺼울뿐더러 날카롭게 서 있지도 않다. 설사 제빵에 관심이 없더라도 양파, 파 등 작고 균일하게 썬 재료를 접시에 옮기거나 냄비, 팬 등에 담는데 칼보다 훨씬 요긴하므로 하나 갖출 만하다. 식도의 날은 곡선을 띠고 있으므로 재료를 그러모아 옮기더라도 빠져나가거나 쏟아지기 십상인데, 반죽칼은 날이 직선으로 평평하니 훨씬 더 효율적이다. 게다가 실수로 떨어트리더라도 발등을 찍거나 날에 손이 베이지 않으니 훨씬 더 안전하다.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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