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 36년, 저항의 역사는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다양한 방향에서 전개됐지만 유독 문화예술계 인사의 공적에 대해 사회의 평가는 박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전체 독립유공자 1만5,511명(4일 기준) 가운데 문화운동계열로 분류된 유공자는 101명(0.65%)에 불과하다.
‘옥고(獄苦)’와 ‘단체 활동 여부’를 중심으로 공적을 심사하는 현행 기준이 문화예술계 유공자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협애한 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훈처는 수형 기간과 독립운동 단체 활동 기간 등에 따라 건국훈장(5등급),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을 수여한다.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ㆍ1904~1944ㆍ애국장), 서양화가 도상봉(1902~1977ㆍ대통령표창) 같은 문화계 인물 역시 재판과 수감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현행 기준이 품지 못하는 대표적 인물이 간송 전형필이었다. 전 재산을 바쳐 해외로 반출될 뻔한 서화와 고려청자 등 문화재를 지켜냈고, 기와집 수십 채에 해당하는 돈을 줘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을 사들여 망실을 막았지만 서훈의 충분조건과 거리가 멀었다. 이밖에 간송은 한글학자 홍기문, 서지학자 송석하에게 해례본을 필사하도록 해, 다른 이의 명의로 해례본의 존재와 내용을 신문 지면에 상세히 알렸다. 일제 어용학자들이 “한글은 세종대왕이 용변 중 화장실 창살을 보고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한글의 가치를 폄훼하던 시절에 이뤄진 일들이다. 보훈처의 서훈 기준에 합당하지 못했던 간송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이들에 수여하는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받는 데 그쳤다.
문성근 흥사단 정책기획국장은 “독립운동의 양상은 여러 갈래로 존재하는데, 현행 기준은 명확하게 공개되어 있지 않고 비교적 획일적으로 보인다”라며 “미래 지향적이고 다양한 서훈 기준을 마련해 유공자 발굴을 확대하는 것이 과거 독립운동을 한 위인에 대한 예우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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