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연명의료 고민깊은 의사들
※‘메디 스토리’는 의사, 간호사 등 의료계 종사자들이 겪는 애환과 사연, 의료계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한국일보>의 김치중 의학전문기자가 격주 월요일 의료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말기ㆍ임종기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의사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제도 도입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생사(生死)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환자의 뜻을 확인할 수 없을 때에는 가족들의 진술을 확인한 후 연명의료 지속과 중단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의사들이 아무리 의학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사실상 환자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 가족 불화, 독신, 이혼 같은 이유로 연명의료를 중단하게 되고, 가족들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뜨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존엄사가 아닌 소극적 안락사를 조장한다”는 자조까지 나온다.
법적으로 연명의료 중단을 할 수 있는 환자는 말기(암, 만성폐쇄성호흡기 등의 환자로 근원적 회복이 어렵고 수개월 내에 사망 예상되는 상태)나 임종기(담당의와 전문의 1명이 회생가능성이 없고 사망 임박 상태로 판단한 상태) 환자다. 하지만 의사들은 회생 가능성이 있는 말기ㆍ임종기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돌볼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경제적 여유가 없어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하면 할 수 없이 보호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는다.
지난해 10월 이물질이 기도에 흡입돼 폐에 염증이 생긴 흡인성 폐렴 증세로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인공호흡기를 달았던 80대 여성 환자는 20년 넘게 치매를 앓고 있었다. 환자 보호자는 외아들 A(45)씨가 유일했다. 의료진은 A씨에게 흡인성 폐렴 치료를 위해 기관절제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A씨는 이를 거부하고 인공호흡기를 떼줄 것을 요구했다. 20년 넘게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모은 돈도 다 날려 어머니를 돌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사실 만큼 사셨고, 정말 이젠 더 해 드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치료가 중단된 환자는 요양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나마 이 경우는 환자의 의사 능력이 없는 경우이지만, 의사 능력이 있는 환자를 배제시키고 자신들과 이야기를 하자고 나서는 보호자들을 만나면 난감할 수밖에 없다. 최천웅 강동경희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의학적으로 치료를 하면 환자 상태가 호전될 수 있어 치료를 하자고 설득은 하지만 보호자가 끝까지 치료중단을 요구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의학적으로 연명의료중단이 맞다고 판단해도 보호자들이 반대를 하면 연명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도 있다. 서울 모 대학병원의 B교수는 “연명의료를 중단하면 환자를 모실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책임질 수 있냐며 악다구니를 쓰는 보호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명의료판단을 유보한 채 환자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치료를 하는 의사들도 상당수라는 게 현장의 전언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환자나 보호자에게 연명의료 지속 여부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전하지 않고 치료를 하면 욕이라도 먹지 않는데 보호자들을 설득하느라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연명의료에 관한 환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할 수 없고, 가족들의 진술도 확보하기 어려울 때 환자 가족 전원(올 3월 시행령 개정 전 기준, 배우자 및 1촌 이내 직계 존비속)의 합의를 구하도록 한 현행 규정도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월 경기 부천의 한 대학병원에서 혈액종양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C교수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두경부암과 폐암을 동시에 앓고 있는 50대 남성 환자의 상태가 급속히 악화돼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보호자와 상의해야 했다. 약속 시간보다 1시간 늦게 나타난 보호자는 40대 후반 여성으로 당연히 배우자일 것이라 생각하고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지만 뜻밖에 이 여성이 “난 그 사람 아내가 아니다”라고 답한 것. 이 여성은 환자의 내연녀였고, 법적인 결정권이 없었다. C교수는 수소문 끝에 환자의 유일한 혈육인 형을 만났지만, 환자의 형은 냉정했다. “오래전에 동생과 왕래를 끊었고, 동생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며 내연녀와 상의하라는 말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C교수는 다시 이 여성을 찾아 상의했지만, 이 여성은 치료를 중단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워 돈을 벌어야 해서 퇴원 후 마지막을 돌봐줄 수 없다”며 연명의료 중단을 거부했고, 결국 이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가 3월말에 사망했다. C교수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른 환자가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 의사로서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연명의료중단이 가능한 말기와 임종기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경우도 많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전상훈 부천성모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말기 암 환자의 경우 환자가 임종기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지만 간경화, 폐섬유증 등 만성질환 환자들은 합병증이 발생해 상태가 위급해도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같은 연명치료를 통해 회복될 수 있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환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무리 짓도록 하자는, 연명의료결정법 도입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만연된 생명경시현상이 개선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갖춰져야 법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우 신부(가톨릭대 생명대학원장)는 “연명의료 결정은 죽음을 선택하는 수단이 아니라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라며 “말기, 임종기 환자들이 침대에만 누워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지만 엄연히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인간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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