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과거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던 경제인을 상대로 무리한 기소를 했다가 1~3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검찰 조사를 통해 한 차례 무혐의 처분을 받았던 사건을 무리하게 기소했다는 점에서 기소권을 남용한 사례로 부상하고 있다.
2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서울중앙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은 2016년 채규철 전 도민저축은행 회장을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채 전 회장이 2010년 해외 유명 자동차 딜러였던 김모씨 측과 “김씨 측이 25억원을 도민저축은행에서 대출해 채무 98억여원의 일부를 변제하면 해외 도피 중인 김씨 아들과 관련된 형사고소를 취하하겠다”는 취지의 합의서를 작성한 뒤 대출 받은 25억원 중 5억여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혐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기소 내용은 2015년 서울서부지검 중요경제범죄수사단이 무혐의 처분했던 사건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같았다. 당시 경찰은 물론 검찰에서 채 전 회장이 썼다는 5억여원의 사용처를 수사했고, 이 돈이 실질적으로 도민저축은행과 채무자들을 위해 사용됐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에 서부지검은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어쩐 일인지 중앙지검 중경단은 혐의만 사기에서 횡령으로 바꾼 뒤 새로운 증거 추가도 없이 채 전 회장을 재판에 넘겼다. 채 전 회장은 “무혐의가 나 끝난 사안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기소됐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너무 황당해 당시 중경단 수사팀에 ‘소환 조사 한 번도 안하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기소하는 게 어딨느냐’고 항의했지만, 수사팀은 ‘혐의가 있으니 기소한 것일 뿐’이라는 답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는 법원에서 바로 들통이 나 버렸다. 1심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채 전 회장이 개인용도로 문제의 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명확히 지적했으며, 항소심 재판부도 “검찰은 ‘1심이 사실을 오인했다’고 주장하지만, (새로운 혐의나 증거 등으로) 범죄 사실을 전혀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고 일갈했다. 대법원 역시 1~2심이 지적한 무리한 검찰 기소 등을 모두 인정하며 지난해 12월 최종 무죄 판결을 내렸다.
통상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하더라도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추가 기소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처럼 새로운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혐의 사건을 기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문에 법조계 주변에서는 채 전 회장이 무리하게 기소를 당한 이유가 분분하게 거론되고 있다.
검찰 안팎에서는 과거 저축은행 수사 당시 채 전 회장이 검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아 ‘미운 털’이 박혔다는 점을 우선 거론한다. 채 전 회장은 이른바 ‘친노’ 그룹의 정치적 후원자로 지목돼 2011년 대검 중앙수사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채 전 회장은 친노 후원과 관련한 구체적 진술을 하지 않았고, 대주주와 개별 기업에 부실ㆍ불법 대출을 해준 혐의(상호저축은행법 위반 등)로만 기소돼 징역 4년을 살았다.
채 전 회장이 출소 후 중수부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관련 형사 고소를 진행하고 있는 점도 보복성 기소의 배경으로 거론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채 전 회장이 중수부 수사의 과오를 지적하기 위해 재계 관계자를 무고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중앙지검에 넘겼지만 1년 넘게 검찰 캐비넷에 잠들어 있다”며 석연치 않은 대목을 지목했다. 한국일보는 채 전 회장을 기소했던 중앙지검 중경단 관계자들에게 무리한 기소의 배경을 묻기 위해 연락했지만 모두 답변을 거부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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