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 “그동안 헛발질만… 산업경쟁력 약화가 일본 보복 불러”
“이번 사태는 빙산의 일각이다. 주요 기업 간의 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모든 걸 기업에만 맡겨놓으면 기초기술이 부실한 한국의 산업경쟁력은 추락을 거듭할 수 있다.”
국내 산업정책 전문가로 통하는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난 10여년간 정부와 기업이 산업경쟁력 강화에 헛발질을 한 게 일본의 보복사태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산업 패러다임이 협업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한국 기업은 협력해 기술력을 높이기 보단, 대중 수출이 가져다 준 이익에 취해 각개전투에 나섰다”는 것이다. “기존 산업 경쟁력 강화 대신 정부도 한정된 예산을 정보기술(IT)ㆍ나노기술(NT)ㆍ바이오기술(BT)ㆍ인공지능(AI) 등 신산업에만 투자하면서 어떤 분야에서도 두각을 내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고 진단했다.
이 선임연구원은 2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주력 산업 제품에 들어가는 중간재 중에서 국산화한 부품이 60%도 안 된다”며 “외국의 부품 수출 규제와 그로 인한 국내 산업계 타격은 반도체뿐 아니라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언제든 터져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선임연구원은 “우선적으로 반도체ㆍ다스플레이ㆍ자동차 등 주요 품목의 전체 공급망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대외의존도가 높은 핵심 부품ㆍ기술의 국산화를 추진해나갈 수 있어서다. 그는 “공정이나 제품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소재ㆍ기술 가운데 대체가 불가능한 것들은 전략물자처럼 우선적으로 연구개발(R&D)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만든 ‘세마텍(SEMATEC)’을 언급하며 “정부가 앞장서고 기업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원천기술 확보, 신기술 개발 등에 나서야 하고, 기업들이 협업할 수 있는 틀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마텍은 일본 반도체 기업의 약진을 우려한 미국 정부가 14개 자국 업체들의 공동 연구를 위해 1987년 텍사스주(州)에 세운 시설이다. 세마텍에서 개발된 비메모리 반도체로 미국 반도체 산업계는 다시 약진할 수 있었다. 이 선임연구원은 “삼성에서 자동차용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어도 현대차에서 써주지 않는 게 국내 산업계 현실”이라며 “유관 기업 간의 협력이 활발히 이뤄진다면 원천기술 확보 등 개별 기업이 하기 어려운 문제도 보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내용을 아우를 산업정책은 장기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선임연구원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뒤바뀌는 산업정책은 문제가 많다”며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중국의 중국제조2025 계획처럼 장기적인 산업정책을 세우고, 부처 별 칸막이에 따로 놀고 있는 기술과 인력육성 정책 등도 통합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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