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 5> 정치까지 활용한 그림 애호가 숙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는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배경지식 없이 보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이지만, 어부와 나무꾼이 만나 만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는 고사에 연원을 두고 있다. 두 주인공은 실제로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생활인이라기보다는 마치 깊은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듯한 현자(賢者)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과연 이들은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그림을 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상상력이 이어질 수 있겠지만, 그림 위쪽에 누군가가 자신의 감상을 글로 남겨 놓아 참고가 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나무꾼과 어부가 주고받은 말은 해로움과 이로움에 관한 것이라네(應語樵漁害利耳 응어초어해리이)’라고 적고 있어서 두 인물이 나누는 세상 이치에 관한 대화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상평을 남긴 이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ㆍ재위 1674~1720)이다.
글의 내용 속에는 숙종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맨 끝에 찍혀 있는 붉은 색 인장이 바로 주인공을 알려 주는 단서이다. 왕의 글이라는 뜻의 ‘宸章(신장)’ 두 글자를 새긴 이 인장은 숙종이 사용했던 것이다. 글의 말미에는 ‘을미년 8월 하순에 썼다(歲在乙未仲秋下浣題ㆍ 세재을미중추하완제)’라고 글 쓴 시기를 밝히고 있는데 숙종 재위 시의 을미년은 1715년이 된다. 우리는 지금 약 300년의 시차를 두고 조선의 왕 숙종이 감상했던 그림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이 그림을 보고 그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숙종이 감상평을 적은 그림은 ‘어초문답도’ 이외에 몇 점이 더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조선의 역대 왕들이 지은 글들을 모아놓은 ‘열성어제(列聖御製)’를 보면 숙종이 그림을 보고 나서 지은 시문이 다수 실려 있다. ‘무슨 무슨 그림을 보고 짓다’라는 형식의 제목만 추려 봐도 100여수 이상이 된다. 그림에 관해서라면 조선의 어느 왕도 숙종만큼 많은 글을 남기지 못했다.
좋아하는 완상물은 없지만(物皆無所好 물개무소호)
오직 이름 있는 그림은 즐긴다네(惟獨嗜名圖 유독기명도)
이 때문에 그림을 많이도 모았는데(由玆多致畵 유자다치화)
역시 뛰어난 것만을 모으는 버릇이 되었다네(亦自癖成殊 역자벽성수)
이 글은 숙종이 ‘연화백로도(蓮花白鷺圖)’를 보고 그 위에 남긴 글이다.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서 많은 그림을 모았다는 사실을 직접 밝히고 있으며 또 은연중에 뛰어난 그림을 알아보는 자신의 식견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평이라기보다는 마치 그림 취향에 관한 숙종의 자기 고백처럼 들린다. 조선시대 국왕의 자리에서라면 본인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나라 안의 좋은 그림들을 두루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열성어제’에 실린 글의 내용을 보면 숙종은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을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산수, 동물, 인물, 풍속, 역사고사 등 전통 그림에서 다루어지는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으며 당시 조선에서 이름난 화가의 작품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작까지 숙종의 감상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른바 감식안(鑑識眼)이라는 것도 일정 수준 이상의 물량을 전제로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일 테니 숙종이 내보인 자신감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최고통치자라는 자리에서의 그림 감상은 그저 취향의 영역으로만 남겨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열성어제’에 실린 글 중에는 숙종이 농사일의 어려움을 담은 그림을 감상하고 남긴 글(題稼穡艱難圖 제가색간난도)이 있다. 그 중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민가에 몸소 간 듯하고(窮閻蔀屋如身臨 궁염부옥여신림)
누에치는 아낙과 농부를 눈으로 보는 듯하네(蠶婦農夫若目見 잠부농부약목견)
가난의 큰 고통을 어찌 잠시라도 잊으랴(愁痛艱難何暫忘 수통간난하잠망)
백성들을 보살핌이 정치의 우선이네(惠鮮懷保政宜先 혜선회보정의선)
이 그림은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이어지는 농가의 여러 일들을 빠짐없이 그린 병풍이었고 숙종은 이것을 늘 어좌(御座) 옆에 두었다고 한다. 현재 그림은 남아있지 않으나 아마도 백성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숙종은 이 그림을 보면서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또 정치의 기본을 생각하였다. 숙종이 감상한 그림 중에는 교훈적인 내용의 고사, 역사적으로 추앙받는 충신 등을 소재로 한 그림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들은 자기 성찰을 위한 거울이 되기도 했을 것이며 이러한 주제의 그림을 가까이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뚜렷한 정치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말이나 글보다도 그림을 통해 뜻을 드러내는 방식이 더 효과적인 법이다.
그림에 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었던 숙종은 어진(御眞ㆍ왕의 초상화)을 그려서 봉안하는 일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역대 왕들의 어진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이후 거의 100여 년간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하는 체계가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1688년 전주의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사하여 새로운 태조 어진을 제작하고 한양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성리학적 명분론 위에서 조선 창업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창업주인 태조에 대한 역사적 환기를 통해 그로부터 이어져온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담은 행위로 해석되고 있다.
태조 어진이 한양에 봉안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숙종은 자신의 어진도 그려 강화도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왕의 어진이 그려지지 못했고 또 생존해 있는 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숙종의 이러한 결정은 신하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만 했다. 그러나 숙종의 과감한 결정은 조선 후기 어진 제작과 관련된 제도가 다시 운영될 수 있는 시초가 되었다. 이후의 왕들은 숙종의 전례를 따라 자신의 어진을 그리고 봉안하였으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정치적 의미를 담아냈다. 다만, 안타깝게도 숙종의 어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숙종은 만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여 당쟁과 환국으로 대표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군주이다. 숙종의 그림 취미를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한 ‘문예적 취향’ 정도로만 보기에는 그가 마주한 정치적 상황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어부와 나무꾼 그림을 통해 보고자 했던 세상의 이치, 숙종이 말하는 이로움과 해로움은 무엇이었을까. 숙종 자신이 펼치고자 했던 정치,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보듬어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정치,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신재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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