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울산 북구 우가항에서 동해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도로에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상 3층 카페가 새로 생겼다. 회색 노출 콘크리트 두 덩어리가 포개진 건물이 인근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금세 ‘울산의 웨이브온’이란 별칭을 얻었다. 여기서 불과 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부산 기장 앞바다에 있는 건물 ‘웨이브온(Wave On)’에 빗댄 것이다.
2016년 12월 완공된, 부산 기장의 ‘원조’ 웨이브온은 곽희수 건축가(이뎀건축사사무소)의 작품이다. 곽 건축가는 장동건ㆍ고소영 부부의 ‘신천리 주택’, 원빈의 ‘루트하우스’ 등을 설계했다. 노출 콘크리트를 곧잘 활용하는 그는 건축계에서 ‘콘크리트 마술사’라 불린다. ‘웨이브온’ 또한 “주변 자연과 잘 어우러진 건축물”이란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2017년 세계건축상(WA),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민간부문 본상을 받았다. 지금은 연간 100만명 정도가 찾는, 지역 대표 명소가 됐다.
부산 기장과 울산 북구의 건물은 바닷가에 바로 접하고 있다는 입지에서부터 규모, 외관, 내부 구성에다 장식까지 쌍둥이 건물처럼 똑 닮았다. 곽 건축가는 “책에 비유하자면 건축에도 단어, 문장, 문단이 라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단어와 문장을 인용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책 자체를 통째로 베낀 것”이라며 “설계에서 준공까지 어떤 제재가 없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고 말했다. 곽 소장과 ‘웨이브온’은 결국 지난해 12월 울산 카페와 이를 설계한 건축사사무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울산 카페를 설계한 건축사사무소 측은 “‘웨이브온’의 존재를 몰랐고, 아직 보완할 부분이 있어 표절로 보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곽 소장은 강경하다. 그는 “‘웨이브온’ 2년 뒤에 지어진 건물인데 존재를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며 “심지어 외관뿐 아니라 내부 구성과 인테리어까지도 우연히 같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곽 소장이 이처럼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건 건축 디자인 표절을 “경찰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공인 건축 면허를 가진 이가 아무 거리낌없이 디자인을 베낀다는 것은 건축가 스스로 제 살을 깎아먹는 행위다”라고 성토했다. 곽 소장은 2016년 강원 홍천에 지은 펜션 ‘유리트리트(U-Retreat)’를 빼닮은 건축 모형이 한 소형 건축사사무소 홈페이지에 버젓이 게재돼 있는 것을 알고 또 다시 소송을 검토 중이다.
곽 소장은 이번 소송으로 판결문을 반드시 남기겠다 했다. 그는 “건축 표절은 대개 항의하고 합의하고 끝낸다”며 “그러다 보니 판례가 안 생기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둔감해져 버렸다”고 지적했다.
지난 17일 경주시가 경주타워의 설계자로 이타미 준(1937~2011ㆍ본명 유동룡)임을 공식 인정하는 현판을 세우면서 건축 표절 문제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술, 문학, 영화 등 다른 장르에서는 표절 문제가 종종 논의됐지만, 건축 표절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온 측면이 있어서다. 저작권 기준이 모호한데다, 거액의 비용을 들인 건물을 굳이 허물고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 건축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던 탓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건축 표절 소송 사례가 차츰 늘고 있다. 삼각텐트를 모티프로 한 경기 용인의 한 펜션이 같은 디자인으로 지은 강화도 펜션 건축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2013년 1,0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2015년 서울 강남의 복합문화공간 ‘크링’도 외관이 비슷한 제주의 한 면세점에 문제를 제기한 뒤 사과와 보상을 받은 바 있다.
건축계에서는 언젠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반응이다. 한 중견 건축가는 “상업적인 용도로 지어진 건축물이 사람들 관심을 받고 명소가 되니깐 이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관행이 비일비재하다”며 “하지만 소송 중에는 아무 처벌이나 제재가 없고, 소송에 대한 부담 때문에 건축가가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로 유야무야 되기 일쑤였다”고 토로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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