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기 하루 앞둔 12일 대구 남산동 생가서 문패 달기 행사
생가는 '전태일 기념관'으로 재탄생... 4억3,000여만원 모금해
동생 전태삼씨 "대구 생가는 우리 가족들의 운명이 시작된 곳"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전태일(1948-1970) 열사 50주기를 하루 앞둔 12일 오후 4시 전 열사가 유년 시절을 보낸 대구 중구 남산동 2178의 1 생가 주변에는 '사계'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날 전태일 문패 달기 행사에는 이재동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과 전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등 관계자 5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연대사와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 황규관 시인과 조기현 시인의 기념시 낭독, 현장 기부금 전달식, 전태일 문패달기 순으로 진행됐다.
전태삼씨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전 열사에게 수여된 무궁화장 훈장을 대신 수상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이 훈장은 국민훈장 중 첫 번째 등급이다.
전 열사와 어린 시절을 대구서 보낸 전태삼씨는 ‘전태일’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집 안 나무 기둥에 걸리자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문패 달기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전 열사가 다녔던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까지 300여m 등굣길을 함께 걸었다.
전태삼씨는 어릴 적 일화도 털어놨다. 전 씨는 "옛날에 인근 허씨 아줌마네 헛간에서 4남매가 함께 놀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가스에 중독돼 쓰러졌다"며 "일을 마치고 돌아온 허씨 아줌마가 동치미 국물을 먹이고, 마당에 한명씩 끌어내려 주지 않았다면 모두 그때 하늘나라로 갈 뻔했다"고 말했다.
전 씨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의 장소라고 생가를 표현했다. 그는 "생가는 우리 가족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찾기 위해 흩어지면서 험난한 인생이 시작된 운명의 출발점"이라며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집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수시로 전 집주인과 만나 매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께서도 이 집에 다시 와보셨다면 좋았을텐데, 먼저 가신 것이 참 아쉽다"고 털어놨다.
전 씨는 "형은 대구를 떠난지 17년 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며 “자라나는 세대들이 전태일의 일생을 공부하면서, 삶에 대한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대구에 전태일 기념관 건립을 목표로 지난해 3월 출범했다. 이들은 같은 해 9월 전 소유주와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모금활동을 통해 시민 3,000여명으로부터 4억3,000만원 정도를 모금했다.
지난 3~10일에는 전태일기념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전시회를 열고 대구 광주 지역 작가 등 50명의 작품 68점을 판매하기도 했다. 전태일 50주기인 13일 오후 2시 경북대 글로벌프라자 효석홀에서는 ‘지금 여기 전태일’이라는 주제로 전태일 50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움이 열린다.
생가는 전태일 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앞으로 시민 의견을 수렴해 기념관 조성 방향을 논의할 계획이다.
대구 남산동 전태일 생가는 전태일 열사가 1962~1964년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으로 1955년 지어진 목조주택이다. 전 열사는 이 시기를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전 열사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갔다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살았다.
전태일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으로 일하다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뒤 1970년 11월13일 분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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