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강원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을 들렀을 때다. 야트막한 산자락의 화가가 태어난 집터에 들어선 미술관은 고즈넉했다. 낮고 길게 이어진 건물의 벽면은 박수근 그림의 질박한 질감을 닮았다. 차분한 미술관 자체의 분위기에 취했다가 화가의 진본 그림들이 부족해 아쉬움을 느낀 기억이 있다. 작은 미술관의 여력으로는 몇 년을 모아도 박수근 그림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박수근미술관이 최근 뜻밖의 경사를 맞았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박수근의 그림 18점을 기증한 것. 꿈 같은 일이 벌어진 미술관은 환호를 질렀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지역의 공공미술관 5곳이 ‘이건희 컬렉션’의 걸작 선물 보따리를 받아 갑자기 분주해졌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기증품들은 양적이나 질적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2만1,000여 점이 기증된 중앙박물관은 그 양이 너무 많아 받는 데만 한 달이 걸린다고 한다. 1,500점가량을 받은 현대미술관은 ‘이건희 컬렉션’ 덕에 드디어 소장 미술품 1만 점 시대를 열게 됐다. 또 이번 기증으로 모네, 고갱, 달리, 샤갈, 피카소, 미로 등 해외 거장들의 작품을 처음 소장하게 되는 영광도 안았다. 지난 주말 현대미술관은 앞으로의 전시 일정을 발표하면서 기증품들을 살펴보니 이중섭의 ‘흰소’, 이상범의 ‘무릉도원도’ 등 희귀작들이 포함돼 있었다고 놀라워했다.
유족들은 박수근미술관을 포함해 지역 미술관 5곳에도 기증품을 전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작가와 작품이 지역에 깃든 사연까지 고려해 기증 작품들을 살뜰히 챙겨 보내줬다고 한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과 박수근미술관, 대구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혜택을 받은 곳들은 하루아침에 미술관의 품격이 달라졌다.
하지만 ‘세기의 기증’이 이뤄진 후 이상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놀라운 작품들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자 이건희 컬렉션만을 위한 미술관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회장의 기증 정신을 살 살려 국민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있자, 특별관 설치가 기정사실인 양 어디에 지어지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부산 광주 경남 전남 수원 밀양 등지에선 지자체장이나 지역 의원들이 앞다퉈 유치 경쟁에 뛰어들며 지역민들에게 괜한 기대를 부추기고 있다.
모두의 미술품이라며 국가기관에 기증한 유족들의 참뜻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들이다. 삼성 가문이 돈이 없어서 새 미술관을 짓지 않았겠는가. 리움미술관에 모아 전시했어도 충분했을 일이다. 또 이미 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 지방의 공공미술관에 나눠준 것을 다시 빼앗아 한데 모으는 게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일부 미술계 인사들이 얼씨구나 이참에 새 미술관 하나 짓자며 시는 땅을 내놓고, 정부는 돈을 내놓으라 목청을 높이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크게 결단한 유족의 뜻을 기리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지 새 건물부터 지을 일은 아니지 않나. 세기의 기증이 이문 남는 토목사업으로 전락해서야 되겠는가. 오랜만의 문화계 경사가 저마다의 잇속만 챙기려는 욕심에 치여 오점이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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