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축기지 기획전 '웨이팅 포 더 선', 5월 8일까지
2년 넘게 이어진 팬데믹은 개인과 공동체의 안위를 자꾸만 묻게 한다. 고단함을 풀고 인간적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여가'라는 달콤한 시간이 필수일 거다. 그 뒷면에는 '노동'이 자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풍족한 여가를 누리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여가 역시 노동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안된 것 아닌가. 인간은 결국 여가와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운명인 걸까.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 '웨이팅 포 더 선(태양을 기다리며)'은 "우리는 나의 노동과 여가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구헌주, 김도희, 김신일, 김영글, 김태권, 박은태, 전리해, 정인지, 조민아, 홍이현숙, 호추니엔, 고(故) 고봉성 등 12명의 회화, 애니메이션, 그래피티, 조형물 등 다양한 시각예술작품 100여 점을 통해서다. 이들은 '역사와 시대 속에서의 노동', '노동과 일상의 가치', '여가적 삶의 인식'에 대해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전시장 벽면을 캔버스 삼아 스프레이로 뿌려놓은 구헌주의 그래피티 작업은 단번에 시선을 끈다. 'Rider 2020'은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폭주족 주인공의 모습에 오늘날 배달노동자를 덧입힌 작품이다. '노는 게 제일 좋아'라는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주제가 한 구절이 새겨진 산 정상석 주변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중년 남녀의 모습이 담긴 '여가의 의미'도 작가 특유의 유쾌한 패러디다. 홍이현숙의 17분 47초 분량의 영상 '당신이 지금 만지는 것'은 마치 ASMR(백색소음) 같다.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의 전신을 구석구석 만지듯 속삭이는 작가의 평온한 목소리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한 박자 쉬어 가게 한다.
1959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일보 등 일간지 기사를 오리고 붙여 만든 고 고봉성의 스크랩북은 감동을 준다. '묘비'라는 제목의 스크랩북 38권 중 20여 권이 전시장에 나와 있는데, 빛바랜 종이 구석구석에 사견과 때론 직접 지은 시를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뒀다. 어두운 시대를 관통한 아버지의 여가였던 셈이다. 그 옆엔 김태권이 세계 노동운동사 주요 인물 18인을 조각한 '8시간 노동을 위한 싸움'이 자리 잡고 있다.
새 먹이를 주는 노숙인과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한 건설현장 노동자의 모습을 포착한 박은태의 작품은 현실에 있을 법하면서 동시에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난해 수림미술상을 받은 김도희는 노동을 쓸모나 교환가치가 아닌 합판을 드릴로 뚫을 때 전해지는 진동의 감각으로 되돌리는 순간을 담은 6분 41초 분량의 영상 '몸의 소실점'을 선보인다.
전시 주제와 관련된 문학·사회학·철학 등 서적과 참여 작가의 자료가 함께 비치돼 있는 것도 특징이다. 관람객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전시장 내 앉아 쉴 수 있는 자리를 곳곳에 뒀다.
전시를 기획한 최윤정 큐레이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여가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찾아보자는 취지"라며 "노동과 여가에 대한 개념이 사물의 '소유'가 아닌 우리 내적인 에너지(자기발견, 존재)를 의미하는 '태양'을 찾아가 보는 하나의 여정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전시는 5월 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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