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 경매 낙찰 총액 전년보다 62% 감소
미술품 가격 구조 알아야 손해 피해
코로나19가 유행한 시점부터 의사들이 그림을 활발히 사 갔다는 말이죠. 20, 30대 경우에는 대출을 받아서 그림을 매입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보름쯤 전에 한 의사가 매입했던 그림을 팔아달라고 연락해 왔습니다. 경기가 악화하고 금리가 올라가니까 포트폴리오(자산 구성)를 정리하는 모양입니다. 좋아서 산 그림은 아니었던 거죠.
서울의 A화랑 대표
미술시장이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세계적 미술장터인 프리즈와 국내 대표적 미술장터인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가 동시에 열렸던 9월과는 다른 분위기다. 한국은행이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1%대로 전망한 가운데 금리까지 오르면서 미술시장도 위축됐다. 화랑이 작품 가격을 공개적으로 낮추기는 어려우니 거래 자체가 줄어드는 모양새다. 지난달 대구에서 열렸던 대구국제아트페어에 참가한 서울의 한 화랑 관계자는 “전시장이 한산해서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서 “관람객들과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붐볐던 키아프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고 돌아봤다.
낙찰가가 공개되는 경매시장에서는 달라진 분위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가 올해 3분기(7~10월) 국내에서 열린 주요 경매들의 낙찰가를 집계한 결과, 낙찰 총액은 366억7,000만 원으로 3분기 기준 지난해보다 62%, 2020년보다 18% 감소했다. 올해 1분기보다도 52% 감소한 수치다. 출품한 작품 가운데 낙찰된 비율을 뜻하는 낙찰률 역시 65% 수준으로 올해 상반기 평균 낙찰률(81%)을 밑돌았다. 정준모 연구센터 대표는 “부동산을 비롯해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비싼 작품들이 경매에 출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온 작품들도 가격이 높게 형성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화랑이 작가 발굴하며 가격 최초 결정
화랑가에서는 불황기일수록 작품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정도는 알고 그림을 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독창적이고 예술성이 뛰어난 그림이 시장에서 인정받기 마련이지만 작품성 외에도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화랑 대표들과 영업 관계자, 미술시장 전문가들에게 그림 가격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동하는지 물어봤다.
작품의 최초 가격은 통상 '1차 시장'에서 정해진다. 작가와 컬렉터(수집가)가 직거래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화랑이 작가를 발굴하면서 협의해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화랑들은 미술대학 졸업생들의 졸업 작품 전시회를 돌면서 예술성이 뛰어난 작가들과 접촉한다. 대회에서 수상한 작가를 만나거나 교수들로부터 추천받기도 한다.
신인 작가들은 대개 무명이어서 작가들 간 작품 가격 차는 크지 않다. 그림 크기인 호(號)수가 비슷하면 가격도 비슷한 식이다. 과거에 널리 사용된 호당가격제로 설명하면 A작가의 호당 가격이 3만 원이라면 10호짜리는 30만 원, 20호짜리는 60만 원에 판매된다. 가격은 1호부터 20호까지는 정비례하고 그 이상은 조금씩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 보통이다. 작가와 화랑은 판매 수익을 5 대 5로 나누는 편이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호당가격제가 쓰이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경우, 호당 3만 원, 많이 받으면 5만 원 정도의 가격이 책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원을 나와서 30대 정도가 되면 호당 5만 원부터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미술시장에서 입지가 탄탄한 대형 화랑과 접촉한 작가는 동년배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공산품도 소매점보다 백화점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과 비슷하다. 화랑마다 전시 기획·홍보 능력은 물론이고 고객의 씀씀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황 회장은 "전국에 화랑이 500, 600곳 정도 될 텐데 작가를 발굴하는 화랑은 100곳이 조금 안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예산업처럼 화랑이 작가를 육성
화랑은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하거나 국내외 유명 미술장터에 출품하면서 작가를 '블루칩'으로 키운다. 화랑이 작가와 계약을 맺고 '전속 작가'로 삼기도 한다. 작가에게 제작비나 생활비를 지원하는 대가로 작품 판매를 독점하는 것이다. 작가가 창작에 전념해 전시·수상 내역을 기록한 작가 이력(CV·Curriculum Vitae)이 길어질수록 작품 가치는 높아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미국 LA카운티뮤지엄(라크마·LACMA) 등 유명 미술관이 작품을 전시하거나 소장했다는 소식은 가격을 끌어올리는 호재다. 화랑들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술관이 작품을 전시하거나 소장하도록 돕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미술품 영업 담당자 A씨는 이를 두고 "연예산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신인 배우가 소속사의 도움을 받아 할리우드에 진출하거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출연료가 비싸지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는 얘기다. 이 담당자는 "기본적으로 작가의 실력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일"이라며 "신인의 작품 가격을 말도 안 되게 높게 책정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대기자 목록 생기면 가격도 꿈틀
작가의 예술적 성취가 인정돼 컬렉터들로부터 연락이 오면 화랑이 바빠진다. 작가와 전속계약을 맺은 화랑에는 이때부터 구매 대기자 목록이 생긴다. 화랑이 단골들에게 작품을 먼저 제공하기에 줄 서도 작품을 못 사는 경우도 있다. 화랑이 가격 인상을 고민하는 시점이다. A씨는 “작년과 올해는 60만 원짜리 그림이 600만 원까지 갈 수도 있을 만큼 활황인 시장이었다”고 돌아봤다.
다만 가격 인상 시기는 예측하기 어렵다. 작가와 화랑마다 전략을 다르게 세우기 때문이다. 처음에 가격을 낮게 책정해서 인지도를 쌓은 뒤 가격을 차근차근 올릴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인기를 얻을 때 급격히 가격을 인상하는 경우도 있다.
경매사들이 공개하는 낙찰가는 시장에서의 인기가 바로 반영돼 일종의 시세 신호로 작동한다. 이처럼 작가와 화랑 손을 떠난 작품이 유통되는 시장을 2차 시장이라고 부른다. 화랑 가운데는 컬렉터에게 작품을 판매하면서 앞으로 2, 3년 동안은 경매에 내놓지 않겠다는 약정을 쓰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경매에서 낮은 가격에 낙찰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높은 가격에 팔리면 소장자들이 앞다퉈 경매에 출품해 가격이 ‘망가지는’ 경우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경매 가격이 급격하게 변동해 거품이 끼기 쉽다는 의견도 있다.
꾸준히 활동하는 작가,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아야
미술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작가의 꾸준한 활동과 성장 여부다. 젊을 때 반짝 인기를 끌다가 수년 만에 작품 활동을 중단하면 그림 가격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고동연 미술사가는 “개별 가격에 앞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안정성”이라면서 “작가들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다가 몇 년 만에 사라지는 현상은 국내 미술시장이 신뢰를 쌓지 못하고 성장이 정체된 이유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화랑 관계자들은 미술 가격에는 다양한 변수들이 많은 만큼, 투자로 접근하기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작품 감상 목적으로 그림을 구입해야 가격 변동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투자나 감상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림의 예술성 그 자체다. 황 회장은 “그림 가격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결국엔 오리지널리티다”라면서 “독창적인 척하지만 어설프게 흉내 낸 그림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오로지 그 작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그림이 결국엔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작품 감상을 통해 안목을 키우는 게 투자에서도 정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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