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시간에 아이들 챙긴 원어민 강사
학원 원장은 추가 휴게시간 요구 거절
갈등 커지자 경고장 쓰며 줄기찬 압박
법원 "적정 수준 넘은 괴롭힘... 배상해야"
하루에 제대로 쉴 시간이 30분밖에 없었던 원어민 학원강사가 학원에 "휴게시간을 30분 더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학원 원장은 요청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학원을 나가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근로자의 정당한 요구에 사용자가 퇴사 위협으로 맞선다면,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48단독 장원정 판사는 원어민 강사 A씨가 어학원과 이 학원 B원장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 기록에 따르면, 2021년 3월 서울 한 어학원에서 근무하던 A씨는 B원장과 휴게시간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A씨는 휴게시간 1시간 중 식사시간 30분은 아이들과 교실에서 보내야 했다. 식사를 관리·감독하면서 영어도 함께 지도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배식을 돕는 한국인 교사의 일이 서툴러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없자, A씨는 B원장에게 "휴게시간을 30분만 더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B원장은 거절했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밥을 먹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학원을) 나갈 수밖에 없다"고 요구했다. A씨가 사직을 거부하자, B원장은 A씨에게 "새 일자리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스스로 나가지 않는다면 교육청에 (당신의 정신상태를) 신고하겠다"고 했다. B원장이 평소 일을 트집 잡아 경고장을 자꾸 보내자, A씨는 조울증 진단을 받고 병가를 냈다.
병가 기간에도 퇴사 압박은 이어졌다. B원장이 "이달 말까지 학원에 복귀하지 않으면 일을 할 마음이 없는 걸로 보겠다"는 취지의 내용증명 등을 보냈다. 결국 A씨는 노동청에 진정을 내고, 법원에도 소송을 제기한 뒤 학원을 떠났다.
노동청은 그해 10월 B원장의 언행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했다. ①휴게시간 1시간 중 절반을 교실에서 식사시간으로 보내는 건 위법하고 ②B원장의 퇴사 강요가 인정된다는 취지였다.
법원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재판부는 "휴게시간은 사용자의 지휘·감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쉬는 시간 30분을 더 달라고 한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B원장의 대응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B원장이 처음 보낸 경고장은 내용이 다소 모멸적인 데다,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등 일방적이었다"며 "B원장이 A씨의 정신상태 등을 언급하면서 강압적으로 그만두라고 요청한 점 등을 고려하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은 위법한 직장 내 괴롭힘이 맞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어학원과 B원장이 함께 지급해야 할 배상금으로는 1,750만 원을 책정했다. 이 판결은 확정됐다.
A씨를 대리한 황윤정 변호사는 "원어민 강사가 국내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위법한 근로계약이 체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학원 뜻에 따라 비자 발급과 연장 여부가 결정되는 구조를 고려하면, 원어민 강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에 국가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한 학원 관계자는 "원어민 강사들이 위약금이 없는 점 등을 악용해 계약 도중 말도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며 "직장 내 괴롭힘은 근절돼야겠지만 처우 개선 문제는 학원을 압박하는 방법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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