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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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동(洞) 글짓기 공모전에서 입상해 난생처음 혼자 동사무소에 갔다. 상품도 상장도 근사하진 않았지만 꽤나 기뻤던 기억이 또렷하다. 학교 울타리 너머에서 받는 칭찬이라니. 그 경험에 빗대어 보니 전국 공모전에서 수상한 학생들의 기쁨은 얼마나 클까, 사실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일이 고작 접수번호 '****'으로만 공지된 일이 학생들에겐 훗날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매년 주최하는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이야기다. 올해도 중·고등부 총 5개 부문을 대상으로 운영된 공모전에는 57명의 재능 있는 학생들이 수상했다. 하지만 통상 수상자의 이름 중간 글자만 가리고 소속 학교와 함께 발표됐던 수상자 공지에 올해는 알파벳과 숫자만 빼곡하다. 매번 부천국제만화축제와 함께 열린 수상작 전시회도, 계획된 일정 일주일 전쯤 갑자기 취소됐다. 지난 16일 시상식만 진행했고, 이후 수상작 공개 여부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 정치적 논란으로부터 공모전 참여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겠다는 이유다.
'수상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기이한 공모전은 작년 행사의 여파다. 당시 고교부 금상 수상작 카툰 '윤석열차'에 대해 여권은 '학생 공모전답지 못하게 너무 정치 편향적'이라고 비판했었다. 카툰은 윤석열 대통령을 열차에 비유하고 김건희 여사가 그 열차에 탑승한 장면을 담았다. 정치 풍자가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카툰'의 장르적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지적임에도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편협한 문제제기를 소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정색하고 받아 오히려 기름을 부었다. 문체부는 공모전에 대한 후원을 끊고 진흥원에 엄중한 경고까지 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자유만 외치는 대통령 아래 '표현의 자유'는 이렇게 외면받았다.
공모전이 사라질까 우려될 정도였으니, 개최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기엔 상황이 위태롭다. 급기야 문체부가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진흥원의 내년 예산(약 60억 원)을 올해 대비 48%까지 삭감하려 한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정부는 20일 "예산의 투입 대비 효과가 부진한 사업, 부정수급 사례가 발견된 사업 등을 심의를 통해 조정한 예산안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감안해도 '오얏나무 아래 갓끈 고쳐 맨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되레 문화계 전반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행태가 떠오른다.
이번 사태는 현 정권이 학생은 물론 국민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미성숙한, 가르쳐야 하는, 검열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역행의 사례들만 봐도 그렇다. 홍범도 장군에 이념을 덧씌우려는 국방부도, 교육 과정에서 '성평등' '재생산권' '성소수자' '섹슈얼리티'라는 용어를 지운 교육부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모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다. 이번엔 국민이 먼저 엄중한 경고를 보내야할 때가 됐다.
(지난해와 올해 공모전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풍자를 모르고 웃기는, 아니 우스운 어른들을 대신하는 사과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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