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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채널 '텃밭주인' 운영자는 트로트가수… '대파 한 단'으로 '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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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채널 '텃밭주인' 운영자는 트로트가수… '대파 한 단'으로 '떡상'

입력
2024.04.2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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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집 간다고야로 데뷔 유일한씨
채널 개설 5년 만에 구독자 44만6,000명
3년 전 '대파 한 단 심어 3년 먹기' 영상
조회수 400만 육박…가수보다 더 유명
1집 후 공황장애…컴백하자 코로나19
텃밭 가꾸는 일상으로 심신회복
소년소녀가장 돕기 재단 설립이 꿈


가수 겸 43만 유튜버 '텃밭주인' 유일한씨. 3년 전 '대파 한 단 심어서 3년간 원 없이 먹는 방법'이라는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인기 유튜버가 됐다. 안지혜 기자

가수 겸 43만 유튜버 '텃밭주인' 유일한씨. 3년 전 '대파 한 단 심어서 3년간 원 없이 먹는 방법'이라는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인기 유튜버가 됐다. 안지혜 기자

구독자 44만6,000명의 유튜버 채널 '텃밭주인' 운영자 유일한(49)씨의 본업은 트로트가수다. 2008년 1집 '간다고야'를 발표하고 16년째 방송활동 중이다. 한때 음원차트에서 티아라, 김종국, 에스지워너비와 경쟁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당시 김종국은 '사랑스러워', 에스지워너비는 '라라라'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성인 가요계에서 대형기획사로 통하는 곳들에서 계약을 하자고 유씨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아쉽게도 1집 활동을 마무리할 즈음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그에게 소속사의 '뺑뺑이' 스케줄이 너무 벅찼던 것이었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한동안 연예계를 떠났다. 마음을 추스르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터졌다.

"시작은 좋았어요. 큰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전국 노래 교실에서 제 노래가 나름 돌풍을 일으켰죠. 알아보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구요. 불이 붙으려는 찰나 코로나19 사태가 들이닥쳤습니다.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갔죠."

하룻밤 사이 10만 구독자 몰려, 이후 ‘농사 공부’ 매진

'가수는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자포자기할 즈음 엉뚱한 곳에서 기회의 문이 열렸다. 서울서 활동하다 경기 용인으로 귀촌, 전원주택에 살면서 틈틈이 텃밭을 가꾸었는데, 이 텃밭과 관련해 생각지도 못한 결실이 맺혔다. 대중에게 텃밭 가꾸기 노하우를 전해주려고 개설한 유튜브 채널에서 히트 영상이 나온 것이었다.

"'대파 한 단 심어서 3년간 원 없이 먹는 방법' 이라고 영상을 찍어올렸어요. 그 영상이 조회수 300만을 찍었어요. 하루아침에 구독자 10만 명이 되더군요. 말 그대로 매일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렸죠. 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12일 현재 그 영상은 조회수 395만으로, 400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구독자도 44만6,000명이 넘었다.

인생 역주행 기회라는 감이 왔다. 대파 영상이 대박 난 이후 6개월가량을 하루에 3시간씩 쪽잠을 자가면서 농사 공부를 했다. 대파 상 때문에 기대치가 잔뜩 올라있는 구독자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였다. 채널의 정체성을 '전원생활의 모든 정보를 브이로그로 보여주는 귀촌 콘텐츠 집합체'로 정했다. 텃밭은 26㎡밖에 안 되지만, 그곳에서 생산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농사와 귀촌 정보를 정보화하는데 주력했다. 구독자 중에는 660㎡ 이상의 농토를 가진 '전문가'도 있지만, 그들도 그의 진심과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유씨는 이제 인기 유튜버 반열에 올았다. 대파 영상 외에도 콩나물 키우기, 말벌 퇴치, 수박 고르기, 모기 잡기, 뱀 퇴치법 등 조회수 200만~300만의 대박 영상을 다수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먹고살려고' 거친 직업 50여개

유씨는 자유로운 영혼이긴 하지만 방탕한 영혼은 아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문이 꽁꽁 닫혔을 때도 '노느니 장독이라도 부신다'는 생각으로 텃밭을 가꾸고 유튜브라는 창을 열어 대중과의 접촉을 시도한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다. 노래할 때는 베짱이였지만 무대 밖에선 성실한 개미였다. 지금까지 50개가 넘는 직업을 가졌다.

경기 여주가 고향인 그의 첫 직업은 '개구리 백정'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개구리를 잡아서 껍질을 벗겨 말린 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백화점에서 판매원 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도시에선 먹고살 길이 없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시골로 들어갔다. 시골에 가니 집은 쉽게 구해졌는데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다. 공장 외에 갈 곳이 없었다. 적성이나 재능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쇠를 자르고 용접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워낙 위험했다. 팔이 절단되는 사고도 목격했다. 일이 힘들어 한 달 겨우 채우고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는 그곳에서 1년을 버티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과일 가게를 열었다. 밤낮을 안 가리고 일했다. 단골도 생기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즈음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몇 달 만에 그 많던 손님이 다 사라졌다. 그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가게를 그만둔 후 조경 일에 뛰어들었다. 장의사 보조를 거쳐 공사판으로 흘러들었다. 공사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봤다. 이후 회사 회장님이나 유명한 예술가들의 수행 기사도 했다. 제일 마지막에 만난 직업이 연예인 매니저였다.

가수라는 꿈을 품기 이전의 삶은 빛도 없는 긴 터널을 행군하는 기분이었다. 발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현실에서 그야말로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고비도 있었다. 죽음의 유혹이 가슴을 슬금슬금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유혹을 뿌리쳤다. 그는 "어떻게 이겨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면서 "살고자 하는 본능이 강했던 거라고 생각할 뿐"이라고 말했다. 고비를 넘기니 다시 힘이 났다. 가진 건 여전히 쥐뿔도 없었지만 거짓말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이 순간도 힘든 터널을 지나가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막막하고 죽는 게 낫겠다 싶어도 조금만 옆으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길이 있다'고요. 내가 살아있고, 포기하지 않으면 살길은 보이기 마련입니다. 살고자 하는 열정만 꺼트리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인민군에게 부모님 잃으신 어머니, 전쟁고아로 성장

그는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을 묻는 물음에 늘 "어머니"라고 대답한다. 그의 어머니를 알고 나면 그가 전쟁 같은 삶을 꿋꿋하게 버틴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6.25 전쟁 와중에 부모님을 여의었다. 두 분 모두 인민군의 총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전쟁고아가 됐다. 당신이 힘들게 살아온 만큼 자식들에게 어릴 때부터 정신무장을 단단히 시켰다.

"종종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들 스무 살까지 밥은 든든히 먹게 해줄게. 그다음에는 너희들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내가 살아보니까 팔다리 멀쩡하고 악착같은 마음만 있으면 못 할 일 없더라' 하고요."

그가 일찍 독립을 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맨주먹으로 시작했지만 주변을 탓하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오직 스스로에게서 찾았다. 그것이 어머니가 가르친 '정신'이었다.

언젠가 지인이 그에게 "너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게 하나도 없잖냐. 빈손으로 뭘 할 수 있겠어" 하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왜 없어. 이거 봐라. 빈손 꽉 쥐면 주먹이 되잖아. 주먹 꽉 쥐고 덤벼들면 못 할 일이 없어. 난 손이 빈 덕분에 일찍부터 주먹 쥐는 법을 배웠다고."

사람은 더불어 살아갈 때 비로소 빛나

그의 인생 모토는 '더불어 사는 삶'이다. 고비를 만날 때마다 으레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은인들이 나타났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힘이 됐다. 군에서 제대한 후 열었던 과일가게가 망하게 되었을 때 단골 손님 하나가 "아이고, 손님이 이래 없어서 어떡해" 하고 말했다. 언짢게 들릴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는 그 손님에게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진심이었다.

텃밭주인 채널도 혼자 힘으로 이룬 게 아니다. 부장판사 출신인 이정엽 변호사가 제일 큰 도움을 주었다. 사실은 유튜버를 시작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이 이 변호사였다. 6년 전 우연히 유씨의 텃밭에 놀러 왔다가 "앞으로 체험과 관광이 가미된 농업의 시대가 열릴 것인 만큼 텃밭 가꾸기를 알리는 유튜브를 열면 잘 될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

"사람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데, 저는 그분 말 한마디에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시야가 훤하게 열리는 느낌이 들었죠."

2집에 수록한 ‘와따네’를 만들어준 디제이(DJ)래피도 빼놓을 수 없는 은인이다. 그는 현재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유씨가 부른 로고송을 5년째 사용하고 있다. 그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5년 동안 전국에 울려 퍼졌다.

디제이래피는 "도전정신이 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나는 법이 없는 친구"라면서 "반드시 큰 성취를 이루어낼 사람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외에도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노현희씨와 여행스케치 조병석(루카), '떠나지마'를 부른 전원석씨 등이 그의 텃밭을 자주 방문하는 손님들이다.


가수 겸 유튜버 유일한(왼쪽 첫번째)씨가 부장판사 출신인 이정엽(오른쪽 첫번째) 변호사와 서울 한강공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지혜 기자

가수 겸 유튜버 유일한(왼쪽 첫번째)씨가 부장판사 출신인 이정엽(오른쪽 첫번째) 변호사와 서울 한강공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지혜 기자


소년 소녀 가장 돕는 재단 만들고파

그의 다음 목표는 '100만 유튜버'와 텃밭주인 이름을 내건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다. 유튜브를 시작할 때 정한 목표다. 카페 옆에는 작은 주말농장도 운영할 계획이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카페를 통해 이제껏 저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요. 단순히 음료를 파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사랑방으로 만들고 싶어요.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힐링이 되는 카페를 꿈꾸고 있어요."

카페에서 나오는 수익금의 일부로 재단을 만들 생각이다. 유씨는 "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에게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제가 누구보다 잘 안다"면서 "재단을 통해 소년소녀 가장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안지혜 기자 (dangrl8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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