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노벨상 이후 문학관 조성 제의 고사
90년대 이후 지자체 문학관 만들기 봇물
보여주기 아닌 교감하는 문학관 필요해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강(53)의 노벨문학상 수상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14일 광주광역시 문화사업 담당자가 노벨문학상을 기념할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 전남 장흥군을 찾았다. 장흥은 한강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85)의 집필실이 있는 곳. 당초 광주시의 계획은 문학관 건립을 포함한 프로젝트였지만 한승원은 ‘모든 건물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딸의 말을 전하며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한강의 노벨상과 떼어놓을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도시인 광주는 물론이고, 이번 기회에 ‘부녀 문학관’까지 만들고 싶어했던 장흥군은 아쉬움을 느꼈을 법도 하다.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 문학관 건립과 운영은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지역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정책이다. 흔히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문학의 유용성이라고 하지만, 문학을 관광산업과 연결하면 외부인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1970년대부터 문학장소와 관련된 관광을 연구하는 문학관광 연구가 시작됐고 문학관을 중심으로 문학관광 개발에 나섰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게 계기다.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을 문화콘텐츠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현재 전국의 문학관이 95개(한국문학관협회)에 달하는 것도 그 결과다. 그중 81%가 비수도권에 있는데 이는 지역에 걸출한 문인이 많았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문학관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높다는 점을 방증한다.
다만 지자체 예산에 의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학관이 잘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가 극명하다는 점이 문제다. 지역 출신 문인과 지역 홍보를 위한 '보여주기식 전시'로 일관된 곳들이 상당수다. 마치 ‘건립’ 자체가 목표처럼 보이는 문학관들이다. 이곳에 가면 작가의 유고, 유품을 무의미하게 늘어놓은 ‘자료 페티시즘의 장’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한 문학연구자는 이를 두고 “지방의 문학관을 찾아가면 몇몇 문학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먼지 쌓인 쇠락한 옛터에 작가 혼자 외로이 살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대부분”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반대로 어떤 문학관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방문객들에게 인생에 대한 성찰 기회를 주거나 현실의 모순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작가와 방문객이 교호(交互)하는 것이다. 내친김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서울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가봤다. 관람객의 발길이 쉼 없이 이어졌다. 시 '자화상'의 모티프가 된, 중국 룽징(龍井) 시인의 생가에서 가져온 우물의 덮개를 중심에 두고 벽면에 전시물을 배치했다. ‘문학을 사랑하고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우리말로 시를 쓰고자 했던 시인’의 생애에 포커스를 맞췄다. 이 문학관을 방문한 한 시민은 “시대 아픔을 느끼는 지식인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우리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고 여운을 남겼다.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 상상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문학관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한강은 문학관 건립을 사양하면서 대신 '책을 많이 사고 많이 읽는 시민이 될 수 있는 정책'을 펴달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시민 스스로 사유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문학의 힘’을 강조한 것일 터다. 관광용 2층 버스, 대유람차, 흔들다리, 케이블카로 경쟁하려는 지자체들이 그 노력을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문학관 만들기에 들인다면 그것은 노벨상 수상자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