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도시에서 봄철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꽃 중의 하나가 철쭉이다. 그런데 이 흔한 철쭉이 문득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다.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꽃은 근래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철쭉이 있었지만 그리 곱지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꽃에 관한 고전 강희안의 에 따르면 세종 때 일본에서 철쭉을 보냈는데 우리나라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색깔이 곱고 꽃이 오래 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 들어와 점차 퍼진 일본철쭉은 왜철쭉이라고도 불렀다. 요즘 사람들은 영산홍과 같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별개의 품종이다. 영산홍은 선홍빛인데 비해 왜철쭉은 석류꽃과 비슷한 주황색이며 개화 시기가 영산홍보다 조금 늦다. 18세기 전후에 활동한 홍중성은 "어느 해 일본에서 온 종자가, 이렇게 해동의 꽃이 되었나? 기이한 색은 붉은 비단이 펄럭이는 듯, 신선의 자태는 주사(朱砂)로 물들인 듯. 어둠 속에선 밤을 훤히 비추고, 밝은 곳에선 타는 노을과 같다네. 음력 5월 되면 막 성개하니, 우리 집에 흐드러진 꽃이 가득하다네"라 한 데서 일본철쭉의 화려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일본철쭉은 값이 무척 비쌌다. 18세기 문인 이헌경은 "절로 꽃 중에 제일가는 품종이라, 평양에서 백 냥의 고가에 팔린다네"라 하였다. 백금(百金)은 백 냥이니 당시 작은 집 한 채 값에 육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철쭉은 '화중제일류花中第一流)' 혹은 모은 꽃의 우두머리 '백화지관령(百花之冠領)'이라 하였다.
16세기의 문인 이제신의 집에도 일본철쭉이 네 그루가 있었다. 이제신은 주위 사람이 시키는 대로 초겨울 멍석으로 잘 싸서 얼어 죽지 않게 하였는데, 이른 봄 집안에 일이 있어 멍석이 필요하여 부득이 하나를 먼저 풀었다. 늦봄이 되자 세 그루의 철쭉은 일제히 꽃을 피웠지만, 멍석을 먼저 푼 철쭉은 봄이 다 가도록 꽃소식이 없었다. 멍석을 푼 후 갑자기 서리가 내렸기에 혹 얼어 죽었을까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가 음력 3월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꽃을 하나씩 하나씩 피우더니 5월 단오까지 오래도록 지지 않았다. 그 사이 윤달까지 끼어 있었으니 석 달 이상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다고 했다. 이를 두고 이제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찍 풀어놓았기에 서리에 억눌렸고, 서리에 억눌렸기 때문에 차례대로 피어나는 것이요, 차례대로 피기 때문에 오래 간 것이다. 멍석을 풀어놓은 일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손상을 입었겠으며, 손상을 입지 않았다면 어찌 오래갈 수 있었겠는가?"
예전 선비들은 꽃을 보고도 공부를 하였다. 요즘은 책을 보고 지식을 얻는 것을 공부라고 하지만, 예전 선비들은 책뿐만 아니라 일을 겪거나 사물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 공부를 하였고 다시 이를 자신의 바른 처신으로 연결하는 공부를 하였다. 이를 관물(觀物)의 공부라 한다. 이것이 예전 선비가 꽃을 보는 뜻이다.
18세기 학자 신경준도 영산홍을 관찰하고 공부를 하였다. 산을 붉게 비춘다 하여 이른 영산홍(映山紅)은 연산군이 특히 좋아하여 일본으로부터 대규모로 수입하려 하였기에 연산홍(燕山紅)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런데 영산홍은 꽃이 필 때는 그 화려함이 다른 꽃과 비교할 수 없지만 꽃이 시들 때는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말라붙은 채 오래 간다. 그래서 시든 후에는 영산홍보다 더 추한 꽃이 없다. 신경준은 "천지의 번화함은 봄과 여름에 달려 있는데 천지는 또한 봄과 여름을 늘 존재하도록 할 수가 없어 가을과 겨울에 시들고 쪼그라드는 일이 생겨나도록 한다.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고 사물은 어떠하겠는가? 이 때문에 때가 이르러 번화함과 무성함이 생겨나면 이를 받아들이고, 때가 달라져서 번화함과 무성함이 가버리면 결연하게 보내주는 것이 옳다"라 하였다. 늙음을 받아들이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올 봄에는 꽃을 보고 무슨 공부를 할까?
이종묵 서울대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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