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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여혐]유아기부터 파랑ㆍ분홍 ‘두 세계’ 격리… 다양한 빛깔로 키워야

입력
2017.07.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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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유아기가 특히 문제적

상술에 아동용품 과도한 젠더화

1970년대 성별 구분 장난감 2%

90년대 들어 50% 이상으로 급증

#2

딸만 해방, 아들은 ‘맨 박스’

아들도 딸도 남자다워진 채

‘여성적=열등’ 인식 지속 땐

여성혐오 문화 종식 어려워

아이들은 탄생과 함께 성별 이분법을 강제받는다.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억압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딸들과 달리 아들들에게는 여전히 전통적 남성상이 강력히 요구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이들은 탄생과 함께 성별 이분법을 강제받는다.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억압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딸들과 달리 아들들에게는 여전히 전통적 남성상이 강력히 요구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엄마, 왜 여자애들은 맨날 울어? 그러니까 우리 남자애들만 혼나잖아. 선생님 안 볼 땐 여자애들이 남자애들 ‘등짝 스매싱’도 얼마나 잘하는데. 우린 남자니까 울 수도 없고. 여자만 살기 좋은 세상이라니까.”

직장맘 A씨는 최근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쏟아내는 여성혐오 짙은 하소연에 말문이 막혔다. ‘여자만 살기 좋은 세상 같은 건 유사 이래 존재한 적이 없다’고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아이는 “엄마 때랑은 세상이 달라졌다”며 막무가내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올바른 성 평등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나름 노력해 왔건만, 이러다 ‘소년 일베’가 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럼 너도 울면 되잖아. 남자라고 울지 말란 법이 어딨냐?” 육아서에서 방금 외운 듯한 A씨의 조언에 아이는 날카롭게 응수했다. “내가 울지 않고 씩씩해서 멋지다며? 여동생은 여자애라 맨날 징징 운다며?” 넘어져도, 다쳐도, 맞아도 울음을 참는 아들을 향해 ‘멋지다, 남자답다’ 하트를 날렸던 지난날의 과오가 떠오르며 A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장 성 차별적인 유아들의 세계

남자와 여자를 두 개의 격리된 세계에 배치하는 성별 이분법은 공식적으로는 그 위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여성은 우주비행사도 될 수 있고, 축구선수도 될 수 있으며, 남성도 발레리노나 전업주부가 될 수 있다. 요리하는 엄마와 신문 보는 아빠가 그려진 교과서 속 삽화는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주행 중 후방디스플레이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쓴 카피가 ‘여자니까 봐준다’인 자동차 광고는 여론의 뭇매를 받고 삭제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대기의 질소처럼 만연한 성차별 의식을 아이들은 탄생과 동시에 자연스레 흡입한다. 초음파 기술의 발달로 태어나기 전부터 파랑과 핑크를 할당받은 남아와 여아들은 친척들의 ‘사내답다’, ‘여자답다’는 ‘덕담’에서부터 루피는 요리하고 뽀로로는 모험하는 TV 애니메이션, 남아는 축구, 여아는 발레로 자연스레 분할하는 유치원 방과후활동, 레고와 바비인형으로 명쾌하게 나눠진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성별 이분법을 익힌다. 집에서 열심히 공기청정기 돌려봐야 바깥에서 들이마시는 성차별 대기를 막을 수 없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영유아기는 특히 문제적이다. 한 인간의 생애주기 중 성 역할 고정관념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기다. 성인들의 세계가 젠더 중립을 향한 통합의 경로를 모색하는 동안, 아이들의 젠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분리되고 있다. 아동용 상품은 옷과 책가방에서부터 식판과 수저, 치약과 칫솔, 껌과 비타민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젠더화 돼 있다. 미국 UC데이비스대 사회학과 엘리자베스 스위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1990년대 본격화됐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완구제조사의 광고 카탈로그를 분석했더니, 성 차별이 보다 만연했던 1970년대 전체 2%에 불과했던 성별 구분된 장난감은 90년대 이후 50% 이상으로 급격히 그 비율이 증가했다. 누나가 쓰던 핑크색 퀵보드를 남동생에게 물려주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자본의 시장확대 전략이었다.

한국은 이 같은 경향이 훨씬 심각해 남아용 완구시장의 규모가 여아용의 두 배를 넘는다. 완구시장은 애니메이션과 절대적으로 연동돼 있는데, 현재 방영 중인 남아 대상 애니메이션이 여아용보다 4~5배나 많다. 총 쏘고 변신하고 출동하고 구출하는 테스토스테론 과다 분비 콘텐츠가 전체 유아용 콘텐츠의 70~80%에 육박할 정도로 시장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남자아이들을 과도하게 남성화하는 문화가 어린이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 같은 현상의 기저에는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어른들의 세계가 젠더 중립을 지향하는 것과 아동의 세계는 티셔츠부터 칫솔까지 모든 것이 젠더로 나뉘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른들의 세계가 젠더 중립을 지향하는 것과 아동의 세계는 티셔츠부터 칫솔까지 모든 것이 젠더로 나뉘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딸들만 해방되고, 아들들은 ‘맨박스’에

페미니즘의 부상과 젠더 의식 확산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은 아들들이 올바른 성 평등 인식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 저명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부상한 2015년 12월 페이스북에 “우리가 딸들을 보다 더 아들처럼 키우고 있다는 게 기쁘다. 그러나 아들들을 보다 더 딸처럼 키우지 않는다면 이런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썼다. 젠더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한쪽의 의식만 올바르다고 해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 아들도 남자답고 딸도 남자다워진 채, 여성적이라고 규정되는 것들은 영원히 열등하게 인식되는 여성혐오 문화가 종식될 수 없다. 남성을 인간의 디폴트로 놓고 여성은 그에 미달하는 제2형으로 인식하는 여성혐오가 지속되는 것이다.

아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로봇과 자동차를 좋아하고, 딸은 생래적으로 인형과 요리놀이를 좋아한다는 근본적 성차에 대한 믿음이 만연하다. 하지만 특정 장난감 선호는 만 2세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인지하고 성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3~5세부터 사회적 기대에 맞춰 자발적으로 내적 관심을 억압한다는 것이 신경과학자들의 공통된 연구결과다. 조 파올레티 미 메릴랜드대 교수의 책 ‘핑크 앤 블루’에 따르면, 3~5세 아동들은 부모가 ‘이건 남자 거야’ ‘이건 여자 거야’라고 말하면 자신의 최초 선호를 수정한다. 핑크 드레스를 골랐던 아들이 로봇으로, 권총을 골랐던 딸이 주방놀이세트로 좋아하는 장난감을 바꾸며 부모의 선택압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성별로 인해 옳거나 그른 것이 되는 편견을 학습한다.

이 같은 성별 이분법은 아이들의 성취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올 1월 사이언스지에 실린 린 비안 일리노이대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이 수학과 과학을 잘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여아들은 6세부터 남성이 여성보다 더 똑똑하다고 믿는다. 6세 이전까지는 남녀 모두 자신의 젠더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6년간 들이마신 성차별 공기 덕분에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말 정말 똑똑하다’는 묘사를 들으면 남아, 여아 모두 주인공이 남자일 거라고 응답할 정도로 젠더 스테레오타입은 강력하다.

수박 겉핥기 성교육

초기 사춘기는 여아 10세, 남아 11세에 시작된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그저 성별이 다른 친구였던 이성을 섹슈얼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이 시선에 성 고정관념이 반영되면 문제가 위험하고도 복잡해진다. 특히 한국은 성교육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 아니라 금욕을 교육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중고등학교의 성교육은 절제가 아닌 금욕이 바탕”, 교육부 ‘학교 성교육 표준안 및 자료개발 안내’ 중) 임신, 낙태, 미혼모 같은 휘발성 높은 이슈가 나오면 학부모와 교사 모두 과민상태가 된다. 차별의 근원적 구조에 대한 인식은 도외시한 채 딸은 피해자 되지 않기, 아들은 가해자 되지 않기가 필사의 목표가 된다.

김성애 전교조 여성위원장은 “학교에서 성을 사랑과 연애라는 감정보다 남녀의 성별 이분법으로만 가르치고 결혼, 임신, 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 전체를 이 이분법에 기초해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눠버리는 게 문제”라며 “근본적 차별 구조에 대한 고민 없이 문구 몇 군데 수정해봐야 여성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해소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성폭력 피해자 유발론 같은 왜곡된 성의식만 강화할 뿐이다.

성별 분리된 놀이에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성별의 친구를 타자화하기 쉽다. 이성친구를 친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포츠팀도 혼성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성별 분리된 놀이에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성별의 친구를 타자화하기 쉽다. 이성친구를 친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포츠팀도 혼성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양성성 갖춘 보랏빛 아이로 키워야

개인이 지닌 고유의 개성을 억압하는 성별 이분법은 남녀 모두에게 공통된 억압이지만, 차별의 근원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특히 아들 부모들에게 결여돼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파랑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소년들에게 울지 말아라, 멋 부리지 말아라, 강인하라, 힘세라 등의 맨박스 규범들은 여전히 강고하고, 차별의 근원적 구조를 익히지 못한 남아들에게 이 전통적 성 역할은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감정을 유발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어느날 갑자기 괴물 일베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소아ㆍ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원칙을 가르치지 않고 편의 위주의 지시만 내리니 젠더의식은 물론 도덕발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대가 싫어하면 그만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존중해줘야 한다’ 같은 원칙을 예외 없이 관철해야 하는데, “그때그때 옳고 그름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이들의 삶 속에서 자기 개념 내지 철학으로 자리를 못 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들에게 특히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성별 이분법의 족쇄를 부수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중돼야 한다는 원칙 아래 대기환경 개선에 준하는 대대적인 혁신 작업이 필요하다. 가정은 그 첫 관문이다. 오 박사는 “가정에서 성 평등이 구현되지 않는데 아이가 책으로 배워 익히기는 힘들다”며 “아버지가 지나칠 정도로 가부장적이거나 반대로 어머니에게 불쌍할 정도로 휘둘리는 가정에서 남아들이 왜곡된 성 인식을 갖기 쉽다”고 말했다.

광고, 만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는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온상이다. 문화 콘텐츠에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보다 거세게 가해질 필요가 있다. 영국 광고표준위원회(ASA)는 18일 “성 역할 고정관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조롱하고 젠더 역할을 강화하는 광고가 개인과 경제, 사회 전반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케 하고 있다”며 “규제안 마련에 착수키로 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BBC에 따르면, 앞으로 영국에서는 온 가족이 어질러놓고 여성만 남아 청소를 하거나 아주 단순한 가사ㆍ육아 노동을 제대로 못 해내는 남성을 보여주는 광고는 금지된다. 특정 활동이 남아 혹은 여아에게만 적당함을 암시하는 광고도 심의 대상이 된다. 다만, 홀로 청소하는 여성이나 DIY 가구를 조립하는 남성을 보여주는 것은 괜찮다.

젠더는 스펙트럼이다. 고정된 이분법의 세계가 아니다. 여아들이 남자의 세계로 뛰어든 것을 권장받은 것처럼 남아들도 여자의 세계로 기꺼이 초대받아야 한다. 미국 한 초등학교에서 교실로 아기를 데려와 돌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남아들의 공감능력이 높아지고 공격성이 감소했다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더 이상 파랑과 분홍의 분리된 두 세계여선 안 된다. 다양한 보랏빛들의 세계여야 한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한 12계명

(뉴욕타임스 6월 1일자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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