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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번쩍 든 젊은 노무현' 열광과 회한 사이

입력
2016.07.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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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30일 서울 마포 통일민주당사에서 열린 3당 합당 결의 전당대회에서 반대토론을 요구하는 노무현 의원. 김종구 제공
1990년 1월 30일 서울 마포 통일민주당사에서 열린 3당 합당 결의 전당대회에서 반대토론을 요구하는 노무현 의원. 김종구 제공

우리는 사진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다. 책에서, 잡지에서, 신문에서, 광고판에서, 그리고 주름지고 겹쳐진 인터넷의 공간에서 매일매일 수많은 사진을 만난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지 고작 몇 년 만에 우리는 거의 모든 개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그렇게 찍힌 무수한 사진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곳곳에 올려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군가 사진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진실, 증거, 역사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사진의 어떤 기계적 신뢰성에 기인한다. 사진에 찍힌 대상이 한때 존재했었다고, 사진 속의 아름다운 이가 실제로도 아름답다고, 사진 속의 땀과 눈물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사진은 꽤 자주 거짓말을 한다. 이 연재의 목적은 그런 사진의 진실과 거짓을 이해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당혹스럽게도 사진의 거짓말은 그것의 진실성을 근거로 작동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독해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사진 한 장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하도록 하자. 먼저 첫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아는, 손을 번쩍 든 젊은 정치가의 사진에 대한 것이다.

기계적 신뢰성이 거짓말을 낳는다

기록적인 폭설이 전국을 뒤덮었던 1990년 1월 30일.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경상일보 서울 주재 사진기자 김종구는 카메라를 들고 서울 마포의 통일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임시전당대회를 취재하고 있었다. 당의 간판을 내리고 여당인 민주정의당, ‘유신 본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는 순간, 어렵게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순식간에 뒤집힐 것이었다. 세 당의 의석 수를 합하면 무려 219석, 야합을 거부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의석수는 고작 70석에 지나지 않았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구국의 결단’을 외쳤지만, 최루탄 연기 자욱한 87년 6월의 거리를 달리며 피를 흘렸던 시민들 중 그 말을 믿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러므로 전당대회는 연극과도 같았다. 김영삼은 객석을 향해 물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 선포합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흔다섯 살의 초선의원 노무현이 손을 들고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김영삼은 노무현을 묵살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손들이 노무현을 잡아 눌렀다. 채 십여 초가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김종구는 노무현을 향해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끊었다. 한국의 정치 사진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그리고 복잡한 운명을 지닌 사진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그가 소속된 매체에 실리기는커녕 인화되지도 못했다(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신문사 기자들도 이 장면의 다른 컷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여러 신문이 보도했다). 노무현이 서울과 부산을 전전하며 출마와 낙선을 거듭하는 동안, 현상된 그의 필름은 라면 박스에 갇혀 12년의 시간을 보낸다. 김종구가 이 사진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노무현이 긴 여정을 지나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된 2002년 4월의 일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스캔해서 노사모와 ‘오마이뉴스’에 공개한다.

노사모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조직화되어 활동하는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노무현 취임에 즈음해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인하다(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사진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정치인을 위해 네트워크에 집결한 지지자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무기와도 같았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십여 년 전의 사진은 엄청난 속도로 복제를 거듭하며 네트워크를 채웠다. 정치나 언론 게시판뿐 아니라 자전거, 게임, 만화, 유머, 독서, 축구, 요리 등 모든 사이트와 블로그에 사진은 침입해 들어갔다.

사진에 입맛 다시는 정치권력

새삼스럽게 말하자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노무현이 아니다. 그의 사진일 뿐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았던 이들은 노무현에게 카메라를 겨누었던 김종구의 눈과 자신의 눈을 동일시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어떤 독특한 믿음을 생산한다. 즉, 사진을 본 사람들은 노무현의 굳게 다문 입술과 강인한 눈매, 힘있게 뻗은 주먹을 ‘보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노무현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고 믿었다. 한때 노무현의 지지율은 60%를 넘었고, 이는 헌정사상 대통령 후보에 대한 최대 지지율이기도 했다.

사실 사진을 통해 생산되는 믿음이야말로 정치 권력이 가장 집요하게 노리는 먹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정치가들의 사진은 그의 따뜻한 내면을 홍보한다. 대학 시절에 참여했던 집회 사진은 보수 정치인의 행보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노무현을 찍은 이 사진은 역사상 어떤 정치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보다 깊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은 사진의 완성도보다는 유통시키는 주체의 역동성 때문이었다. 이 사진을 복제하는 자발적인 개인들은 유례 없이 다양한 경로로 사진을 침투시켰고, 다양한 글을 붙였다. 사진을 보는 것은 정치가 노무현에 대한 친구의 설득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노무현은, 사진을 보고 우리가 멋대로 기대했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개인 노무현의 진정성이나 선의와는 별도로, 대통령 노무현은 한미 FTA를 밀어붙였고, 이라크에 파병했다.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는 군 병력으로 진압했다. 민간 시위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1980년 5월 광주 이후 처음이었다. 대량해고에 맞서 크레인에 올라 129일을 버티다 결국 목을 맨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의 죽음에는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싸늘한 말을 던졌다. 공교롭게도 노무현은 10년 전 그의 변론을 맡았던 인권변호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주먹 쥔 손을 번쩍 들었던 젊은 노무현을 잊었다. 대통령 노무현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5.7%를 기록했다. 이 사진 역시 힘을 잃고 맥없이 네트워크의 아득한 지층 속에 파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역사는 이 사진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9년 4월 30일, 전직 대통령 노무현은 서초동 대검찰청 앞 포토라인에 홀로 섰다. 망연한 눈빛을 하고 양쪽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노무현을 향해 수만 번의 셔터가 끊어졌다. 사진기자들은 이런 것을 ‘플래시 마사지’라고 불렀다. 눈앞에서 정신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두들겨 맞다 보면 뻣뻣한 피의자들도 어느새 말랑말랑해지기 때문이었다.

다시 소환된 삼당 합당 반대 사진

200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조사 받기 위해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뉴스
200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조사 받기 위해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뉴스

카메라들은 그를 놀림감으로 만들 준비를 마친 듯했다. 방송사는 헬기를 띄워 버스를 탄 노무현이 대검찰청을 향하는 모습을 생중계했고, 취재 차량을 타고 뒤따르던 사진기자들은 그가 혹시 화장실이라도 가지 않을까 하며 호시탐탐 카메라를 겨누었다. 한때 ‘바보 노무현’이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별명을 지녔던 그는 이러한 굴욕을 오래 참아내지 못했다. 혹은 참아내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은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고작 예순네 살이었다.

잠깐의 망연자실한 시간이 지났고, 거대한 슬픔이 폭발했다. 대한문에 마련된 시민 분향소에는 2㎞가 넘는 장례 행렬이 밤새 이어졌다. 장례위원회는 전국 각지의 분향소에 몰려든 조문객의 수가 500만명이라고 추산했다. 사회 곳곳에 부글대는 슬픔과 증오가 터져나갈 대상을 찾았다. 노무현의 가장 큰 적이었던 보수 신문들마저 홈페이지에 흰 국화꽃을 매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이 사진이 소환되었다. 한때 잊혀졌던 이 사진은 광폭한 기세로 거대한 슬픔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원래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다시는 그 사진이 찍혀진 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이토록 강직하던 노무현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아프도록 상기시킨다. 이 사진의 두 번째 싸움은 그 슬픔을 연료로 시작되었다.

먼저 이 사진과 뜻을 같이하는 사진들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모여들었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도로 한가운데에 앉아서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노무현, 자신이 파병한 이라크 자이툰 부대에서 군복을 입고 환하게 웃는 노무현, 손녀를 태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노무현, 남루한 군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젊은 노무현,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피우는 노무현. 모여든 사진들은 하나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강고하게 연대해서 네트워크를 가득 채운다. 그들은 입을 모아 묻는다. 우리를 보라. 아니, 노무현을 보라. 그의 소탈함과 인간미, 불굴의 의지를 보라. 그가 죽어갈 때 당신은 무엇을 하였는가. 우리는 가슴 한 구석을 찔린 듯한 기분이 된다.

반성이나 슬픔, 애도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운의 영웅을 잃은 민초들처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 국가의 전직 대통령을 떠나 보낸 시민들처럼 슬퍼하도록 하자. 우리의 기억을 몇 조각의 사진과 어록에 내어주는 대신, 꽤 길고 치밀한 기록물처럼 구성하도록 하자. 사진의 뜨거움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도, 여러 사건과 맥락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

김현호 사진비평가ㆍ출판편집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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