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末年)은, 손에 잡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가는 시기다. 군대 말년의 경우가 딱 그러하다. 전역을 앞둔 말년병장은 빠삭하게 알던 업무의 노하우를 후임에게 인계해야 하고, 내무반에서 내세웠던 권위는 슬슬 거둬들여야 한다.
말년에 놓지 않으려 고집을 부리면 대개 참사가 발생한다. ‘말년 돌아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곧 집으로 갈 사람이 심술을 부리고 목소리를 높이면 후임으로선 참 난감하다. 말년병장이 이렇게 폭주하는 이유는 보통 예전에 받던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서운함이 확 치밀어서다.
난데없이 말년 얘기를 꺼낸 건 얼마 전 그만둔 유일호 부총리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부총리로서 그의 말년은 기구했지만, 품격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을 했고 경제부총리로까지 임명됐던 그는 대통령이 바뀐 후 뒤 한 달간 일을 더 해야 했다.
그 어색한 동거 기간 유 부총리의 행보는 전임 총리나 다른 장관들과 많이 달랐다. 국무위원 제청권을 쥔 총리는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자기 할 일 다했다고 나가 버렸고, 외교ㆍ안보 쪽 최고위 관료들은 미군 무기의 배치 관련 보고를 숨기는 등 인수인계를 엉망으로 했다.
그에 비해 유 부총리는 총리대행으로서 공백을 메웠고, 후임 부총리 임명 시까지 적절한 조치를 하며 충실한 인수인계를 했다. 그는 나가 버린 총리를 대신해 장관 임명 제청권을 행사했고, 새 정부가 추진한 추경안에 사인했다. 민주당 인사들과의 당정협의에도 참가했다. 만약 유 부총리마저 총리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 버렸다면, 새 정부의 조각(組閣)은 그만큼 늦춰졌을 것이다. 그가 법적 요건을 이유로 추경을 반대했다면, 추경안은 후임 부총리가 취임하고서야 빛을 봤을 것이다. 새 정부 출범 후 외교안보 쪽에 비해 경제부처 쪽이 훨씬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공의 일정 부분은 유 부총리 덕이다.
혹자는 그런 유 부총리의 모습을 두고 ‘속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전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까지 지낸 사람이 새 대통령에게 고개 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 코스(경기고ㆍ서울대)를 밟고, 학계(조세연구원장), 정계(재선의원), 관계(부총리) 모두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이가 자존감이 낮을 리 없다. 관료로서 그의 책임감이 사람을 향한 게 아니라 자리를 향했던 걸로 보는 게 맞다.
전쟁 드라마의 수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 마지막 편에 나오는 장면이다. 고속 승진을 한 주인공 윈터스 소령은 소대장 시절 자신이 상관(중대장)으로 모셨던 소블 대위가 자기를 못 본 척 하고 지나가자, 소블을 불러 놓고 일침을 날린다. “경례는 사람이 아니라 계급 보고 하는 거야(We salute the rank, not the man).“
군인 아닌 관료도 마찬가지다. 정권보단 정부를 바라봐야 한다. 정권 교체기라면, 국민 다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에게 주도권을 넘겨 주고, 직을 면할 때까지 정확한 인수인계를 해 주는 것이 품격 있는 공직자의 마무리다. 수십 년 “충성”을 외치며 경례했으면서도 충(忠)이 가야 할 방향을 몰랐던 일부 장군들보다, 예비역 병장 유일호가 공직을 대하는 모습이 훨씬 격조 있었다.
세상 일도 이와 같다. 말년은 쥐고 있던 걸 놓는 때이자, 뒤를 이을 세대 또는 세력과 겸허하게 소통해야 하는 시기다. 그러나 실제론 소홀해진 대접이 서운하다며 몽니를 부리거나, 후배에게 주도권을 주기 싫어 소통을 거부한 예들을 자주 본다. 미래세대가 잘 살 수 있는 선택을 하기보다 과거 가치나 옛 인물에 집착하고, 오로지 젊은이들 기를 꺾어 놓기 위한 선택을 한 어른들의 의도적 퇴행도 우린 봤다.
그래서인지, 그 자신 그것까지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주고 떠난 한 관료의 품격 있는 퇴장에 눈길이 갔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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