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이름이 가장 긴 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이화·금란고등학교라고 한다. 21자이다. 1958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개교한 뒤, 2001년 3월 이화여자대학교 병설 금란고등학교(1960년 설립)와 통합하면서 이름이 더 길어졌다.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의 이 남녀 공학은 중구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와 완전히 다른 학교다. 교명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금란(金蘭)은 쇠보다 견고하고 난초보다 향기롭다는 뜻으로, 매우 친밀한 사귐이나 두터운 우정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 학교를 ‘이대부고’라고 넉 자로 줄여서 부른다.
무엇이든 너무 길면 약칭이 생긴다. 조선의 23대 왕 순조의 원래 시호는 77자다. 순조선각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윤희화준열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대왕(純祖宣恪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浚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大王). 보다시피 온갖 좋은 말이 다 들어 있는데(왕마다 이렇게 좋은 말을 써 올리려야 한다니!), 아무리 길어도 결국은 순조다.
요즘은 특히 뭐든지 줄이는 게 더 심해졌다. TV드라마 ‘응답하라 1994’도 ‘응사’로 줄어드는 판이다. 2012년에 인기가 높았던 ‘해를 품은 달’은 ‘해품달’이 됐고, 같은 해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넝굴당’이 됐다. 그런데 ‘꿈의 시청률’ 50% 달성 여부가 초점인 요즘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은 왜 줄여서 부르지 않을까. ‘왕가’ 또는 ‘왕식’이라고 하는 게 어색해서? ‘왕가(王家)’는 왕가네 식구들이라는 말 그대로인데. 그거 참 궁금하다.
지내놓고 보니 40~50년 전에는 말이나 제목이 길면 긴 대로 그냥 썼던 것 같다. 설령 줄이는 경우에도 ‘해품달’처럼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해를 품은...’ 이렇게 뒷말을 생략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순진해서 그랬던 것일까, 생활이 덜 바쁘고 성격이 덜 급했기 때문일까.
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 일이 있다. 암살된 이듬해인 1964년이었다. 지난해가 그의 50주기였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제목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길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영광에 빛나던 시절 북소리가 그치던 날’. 16자다.
이 90분짜리 영화의 원제는 ‘Years of Lightning, Day of Drums’다. 배우 그레고리 펙이 내레이터를 맡았었다. 그런데 번역을 왜 이렇게 길게 했을까. ‘Years of Lightning’도 영광에 빛나던 시절이라기보다 격동의 세월, 그런 의미 아닌가 싶은데 요즘이라면 그 영화를 뭐라고 불렀을까. ‘영광북’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목이 가장 긴 한국 영화는 남기웅 감독의 60분짜리 디지털 영화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 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라고 한다. 27자. 2000년 12월 개봉. 그 다음은 26자인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강석범 감독), 24자인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김영효 감독) 순이다.
외국 영화 중에서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4년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나는 어찌하여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가 가장 제목이 길다고 한다. 원제는 ‘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인데, 우리나라에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라는 제목의 비디오가 나왔었다.
영화도 영화지만 노래의 제목은 더 길다. 송시현이라는 가수 겸 작곡가의 작품에 ‘조용한 외딴 섬에 엄마새와 아기새가 정답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라는 게 있다. 무려 31자다. 1990년에 한국 노랫말가사 대상도 받은 사람이니 이렇게 긴 제목을 붙인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긴 노래 제목이 있다. 한희정 정상훈 혼성 2인조 포크팝밴드인 ‘푸른새벽’이라는 인디 그룹이 2006년에 발표한 2집 앨범 ‘보옴이 오면’의 다섯 번째 노래다. ‘우리의 대화는 섬과 섬 사이의 심해처럼 알 수 없는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가 그 노래의 제목이다. 총 34자다.
각 분야의 가장 긴 것들을 따지면 한이 없겠다. 한 가지만 첨가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페렉(1936~1982)의 (1968)은 아주 제목이 길다. 어느 대기업 사원이 봉급을 올려달라고 말하러 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상황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법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한 문장으로 돼 있다. 발문 옮긴이의 말, 이런 거 다 빼고 작품 본문만 84쪽犬?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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