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47) 축구 대표팀 감독은 2008년 말, 성남 일화(현 성남FC)의 감독대행으로 지도자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선임 직후 친한 고향 선배 신영철(53) 프로배구 감독을 만나 “형, 아무래도 이동국(38)을 내보내야 될 것 같아”라고 말했다. 이동국은 당시 성남의 최고 스타였다. 신 감독이 이동국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액 연봉에 비해 팀 기여도와 기량이 떨어졌고 플레이스타일도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영철 감독은 그 얘기를 듣고 ‘태용이가 초보 감독이지만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간판 공격수를 내치겠다는 두둑한 배짱과 냉정함을 높게 본 것이다. 성남 구단도 “나이 많은 고액 연봉 선수를 내보내자”고 신 감독에게 제안했다. 김상식(41)과 김영철(41)을 방출 리스트에 올려놓은 구단은 이동국은 상징적인 선수이니 만큼 남겨두자고 했다.
하지만 신 감독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반대했다. “남길 거면 다 남기고, 내보낼 거라면 다 내보내자”고 맞섰고 결국 3명 모두 팀을 옮겼다. 이동국은 전북 현대로 이적해 ‘제2의 전성기’를 꽃피우며 ‘롱런’하고 있으니 전화위복이다. 신 감독도 자신의 색깔에 맞는 선수들을 데리고 부임 첫 해인 2009년 리그와 FA컵 준우승, 이듬해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1년 FA컵 우승을 이끌어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신 감독이 새롭게 축구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 시점에서 오래 전 일을 떠올리는 이유가 있다. 위기에 빠진 대표팀을 수렁에서 건지려면 9년 전과 같은 과감한 결단과 냉철한 상황 판단이 필요하다.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지난 4일 대표팀의 ‘소통 부재’를 지적하며 소통을 잘 하는 신 감독이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말은 너무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지금 대표팀에는 구체적인 진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처방전이 나온다.
대표팀 소식에 밝은 관계자들은 대표팀의 가장 큰 문제로 하나같이 ‘기강’을 꼽는다. 이 점을 지적하자 김호곤 위원장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고, 지금은 선수를 휘어 잡고 그럴 때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기강이 꼭 선수들을 닦달하고 입에서 단내 나게 만드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태극마크를 단 선수로서 최소한의 ‘기강’은 있어야 한다.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감독 시절 대표팀 해외 원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20대 중반의 친한 몇몇 선수들끼리 방에서 카드를 쳤다. 처음에는 심심풀이였지만 언젠가부터 큰 금액은 아니어도 판돈이 걸렸다. 며칠 째 계속되자 보다 못한 고참 선수 한 명이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대표팀에서 최고 스타인 A는 한 번은 코칭스태프에게 강한 질책을 들었다. 다음 날 입이 툭 튀어 나온 채 훈련을 해 스태프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슈틸리케 감독까지 “A가 왜 그러느냐”고 물을 정도로 눈에 띄게 볼멘 얼굴이었고 한다. 한 축구인은 “박지성과 이영표가 뛰던 시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찼다.
신태용 감독은 ‘밀당의 고수’로 통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훈련과 경기 외에는 특별히 선수들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때 한 번씩 큰 소리를 내 선수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성남 시절에는 라커룸의 큰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 찬 적도 있다. 지금 대표팀은 적당하게 어르는 것보다 확실하게 거머쥐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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