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는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사는데 얼마나 불편한지에 대해 썼다. 회식은 잦으면서 채식 메뉴는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탓에 채식인들이 겪는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내용이다.
지난겨울에 두 달 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채식인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 비교할 수 있었다. 방문학자로 체류한 것이기에 주로 대학에 있었고 며칠 여행을 한 정도이기에 아주 수박 겉핥기이긴 했지만, 그 차이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부분의 식당에는 채식 메뉴가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채식 메뉴가 기본적으로 제공됐다.
이는 미국이 여러 인종이 모여 살고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인 점이 작용하는 것 같다. 문화나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거나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이 꽤 많으므로 채식인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고기를 일절 먹지 않는 인도 사람,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이 흔하게 있어서 채식이나 종교식을 찾는 게 어렵지 않은 것이다.
내가 방문한 대학에서는 하루에도 몇 개씩의 공개 강연이 열렸다. 우리나라 대학과 다른 점이 두 가지가 눈에 띄었는데, 첫째는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펼침막을 이용하지 않고 주로 도서관 게시판이나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강연에 대해 공지하는데도 많은 청중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신기한 점은 강연이 보통 점심시간에 열리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페퍼로니, 치즈, 채식 피자 몇 판씩을 준비해 둔다. 나는 채식 피자를 거기서 처음 먹어봤다. 토마토, 시금치, 가지 따위가 토핑으로 올라가 있는데, 먹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맛있었다.
피자가 아니라 샌드위치를 준비한 강연도 있었는데 여기에도 역시 햄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은 채식 샌드위치가 있었다. 간혹 피자가 아니라 좀 더 제대된 된(?) 식사를 제공하는 강연도 있었다. 간단한 뷔페 형식으로 몇 가지 음식을 준비해 놓고 덜어 먹을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역시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은 메뉴가 있기에 채식을 하는 사람도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외부 인사를 초청해서 공개 강연을 할 때 청중이 많이 모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교수들이 학생들을 출석을 미끼로 강제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보다 점심도 주면서 자연스럽게 청중이 모이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식인 것 같다.
식당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미국 식당은 대부분 채식 메뉴가 있어서 이런 곤혹스러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종업원이 서빙하는 레스토랑보다는 손님이 직접 주문하고 음식을 가져다 먹는 식당에 주로 가봤는데 (미국에서는 서빙을 받으면 팁을 주는 문화이기 때문에 가격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의 김밥 집처럼 흔하고 가격이 저렴한 버거집에서도 채식 메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문을 열어 유명한 '쉐이크쉑(보통 쉑쉑버거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버섯으로 만든 ‘슈룸버거’가 유명한데 그런 채식 메뉴를 어지간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는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채식인들은 프랜차이즈 식당 본사에 채식 메뉴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를 한다고 한다. 윤리적인 이유든 종교적인 이유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에서 이런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업 차원에서도 그렇고 다문화를 존중한다거나 윤리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위해서도 그럴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 변화에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남과 다른 특별한 생각을 무시당할 때의 굴욕감을 생각해 본다면, 다양성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깨달을 수 있다. 다양성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글로만 배우기보다 사회에서 직접 체험할 때 더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다양성의 증대는 오히려 반길 일이다. 다양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채식도 그런 다양성 중 하나다. 식당에서도 그런 다양성을 존중 받을 수 있도록 우리도 채식 메뉴를 요구해야 할 것 같다.
최훈(강원대학교 교수, 철학,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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