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사회 상부상조 기능하던 부조문화
의미 상실하고 허례허식 된 지 오래
한해 평균 21만원, 가계 ‘고정비용’
이해관련자 사이에선 뇌물로 변질
‘경조사비 10만원’ 규제 넘어서
부조문화 전반의 개혁 계기 돼야
회사원 A(32)씨는 신입사원이던 3년 전 회사 상사의 모친상에 참석했다가 낯선 경험을 했다. 빈소가 차려진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근조화환이 물밀듯이 배달되기 시작하더니 반나절이 채 안 돼 빈소 내부를 가득 채울 만큼 쌓인 것이다. 결국 A씨는 이후 도착하는 화환의 리본만 가위로 잘라 빈소 내벽과 외벽에 붙이는 일을 도와야 했다. 서울 시내 대학병원 장례식장 한쪽 벽에는 화환 리본이 200여 개 붙은 진풍경이 연출됐다.
당시 하나에 최소 5만원이 넘는 화환들이 리본만 떼인 채로 어디론가 돌려보내지는 장면을 보며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의미가 없는 사회적 낭비”라고 여겼던 A씨이지만 몇 년 간 사회생활을 경험한 끝에 장례식장 화환이 받는 사람에게는 ‘성공의 척도’를, 주는 사람에겐 ‘눈도장을 위한 필수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빈소에서 본인들 화환을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려는 자리싸움도 치열하다”며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한 미덕이 허례허식으로 변질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축의금과 조의금, 화환으로 대표되는 경조사비는 우리 사회에서 부조(扶助ㆍ도움)라는 본래 정신을 잃은 채 오가기 일쑤다. 특히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경조사를 치를 때 ‘을’들이 제 사정은 뒤로 하고 앞다퉈 행사에 참석해 건네는 돈은 ‘부조금’보단 차라리 ‘상납금’에 가까울 때가 많다. 접대에 비한다면 갑에 대한 청탁의 성격이 적긴 하지만, 접대보다 수수(授受)의 저변이 훨씬 넓고 상부상조라는 허울을 쓴 관습으로 굳어져 있다는 점에서 경조사비 관행은 한국 사회의 부패 문화와 깊숙이 맞닿아 있다. 내달 시행되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은 단지 ‘경조사비 10만원’이란 관련 규제를 엄수하는 것을 넘어 경조사비를 둘러싼 관행과 문화 전반을 극복해야 성공적 정착을 기대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조사가 곧잘 지나친 금품 수수와 자원 낭비가 뒤따르는 허례허식으로 변질되는 것은 결혼식, 장례식 등 본질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 행사가 공적으로 확대 해석되기 때문이다. 특히 행사에 들인 비용, 참석자 규모, 화환 수 등을 경조사 주관자의 사회적 위신과 연결 짓는 시각이 문제다. 최근 결혼한 직장인 이모씨는 “우리 집안 첫 결혼이라 아버지 체면을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남편 쪽보다 하객과 화환이 많이 와서 내심 뿌듯했다”고 털어놨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는 “농경에 기반한 전통사회에선 실질적 상부상조 기능을 했던 부조 문화가 급속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호화 예식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졸부 문화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혼주와 상주의 인맥에 속한 이들이 그들의 ‘필요’보다는 ‘체면’을 의식하면서 허례의 악순환은 지속된다. 한 기업 홍보 담당자는 “갑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경조사라면 상대방의 명예욕을 채워줘야 한다는 심리가 생기게 된다”며 “그런 점에서 화환이 유용하다 보니 더 신경 써서 챙기게 된다”고 말했다. 윤태범 방통대 교수는 “갑을 관계에서 비롯하는 경조사 챙기기 문화는 평소 접대, 선물 등을 계속 주고받아 왔던 관계의 연속선상이라는 점에서 ‘접대문화’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다 보니 웬만한 고위직의 경조사는 부조금 수입이 억대를 넘는 일이 예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부조금을 흔히 ‘뿌린 만큼 거두는’ 보험으로 여기지만, 있는 자에게 더 걷어서 없는 자에게 나눠주는 효과가 있는 사회보험과 달리 부조금은 없는 자가 돈을 내 있는 자에게 보태주는 불공평한 보험”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계의 경조사비 지출은 매년 늘어나며 서민경제에 적잖은 압박이 되고 있다. 2000년 월평균 12만2,527원이던 경조사비 지출은 지난해 21만3,513원으로 80% 이상 늘어났다. 특히 경조사비는 가계 사정이 나빠졌을 때 줄일 지출항목에서 후순위(주요 9개 항목 중 7위)에 위치, 사실상 가계 고정비용이 된 상황이다.
일각에선 갑을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경조사비는 뇌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도 나온다. 주는 쪽에서 단순한 체면치레 이상의 대가를 바라는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탓이다. 2년 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승진한 B씨는 “인사발령이 났을 때 조용히 지나가려고 친분 깊은 사람 200명만 추려 ‘자리를 옮기게 됐다. 축하 난은 정중하게 사양한다’고 보냈는데, 이들은 물론이고 각처에서 축하난이 90개 넘게 들어왔다”며 “승진한 내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보낸 사람들도 적지 않아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일부 기관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영전하는 이들에게 거액을 걷어 주는 전별금 관행은 한층 대가성이 짙다. 신광영 교수는 “정관계 고위 인사가 출판기념회를 열고 축하금 조로 과도한 책값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쓰는 일이 논란이 된 것처럼, 이해관계나 권력관계와 관련된 사람들간의 경조사 문화는 언제든지 뇌물 성격을 띨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달 김영란법 시행은 이러한 왜곡된 경조사비 문화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이 법은 공무원, 사립교원, 언론인을 대상으로 직무와 관련 없는 한에서 경조사비를 10만원까지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화환과 부조금을 동시에 제공할 경우 합산해서 상한액 준수 여부를 가리게 된다. 공무원 사회는 2003년부터 공무원행동강령을 제정, 공무원이 받을 수 있는 경조사비를 5만원 이하로 제한하고 직무 관련자에게 경조사를 알릴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시행하고 있는 만큼 법 시행에 따른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반응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첩이나 부고가 없어도 ‘알아서’ 관련자들이 찾아오는 일이 허다하고 경조사비 상한액 규정도 사실상 사문화한 상황이어서, 관가에선 김영란법 시행에 따른 경조사비 규정 변화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김영란법 시행을 경조사 문화 전반을 건전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윤태범 교수는 “경조사 폐해가 갑을 관계에서 비롯하는 측면이 큰 만큼 공직사회 및 공공부문이 솔선수범하고, 민간에선 대기업을 중심으로 상생문화를 정착시키는 등의 근본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장례식장에 낭비적인 화환 대신 재활용 가능한 근조기를 보내고, 청첩장이나 부고에 ‘부조금 사양’을 알리는 등 점차 늘어나고 있는 긍정적 변화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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