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밤, 오누이를 키우는 홀어머니가 떡을 이고 산을 넘는다. 운 없게도 그는 산길에서 호랑이를 맞닥뜨린다. 배고픈 호랑이는 어머니의 떡을 탐낸다. “어흥,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전래동화 ‘해님달님’ 외에도 떡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사례는 많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누워서 떡 먹기’ 등 속담에서도 떡은 맛있고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돌잔치, 혼례, 제례 등 각종 행사 때도 늘 함께 하는 게 떡이다. 혼례를 축하하는 잔칫날, 숨진 이를 애도하는 제삿날에도 떡을 먹으며 마음을 나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격변을 거치고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입맛은 점차 서구화됐다. 빵을 찾는 이들이 늘었고, 한가위 온가족이 송편을 빚는 풍경도 이젠 사라지고 있다.
위기에 놓였다지만 떡은 여전히 명절 필수 음식이다. 올 추석에도 대부분 가정의 차례상에 떡이 오른다. 차례가 끝나면 곧 존재감을 잃고 처치 곤란한 음식으로 전락할 것이지만.
전통 떡이 계륵 신세가 됐다고 하나 떡은 시대 변화에 발 맞추고 있다. 크림을 넣고 색깔을 더하며 현대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려 한다. 보다 부드러워진 질감과 더 화려해진 모양으로 변신을 꾀한다.
위기에 처했던 전통 떡
떡의 시작을 알려면 원시 농경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청동기 시대 쌀농사를 시작하면서 찜기인 시루가 사용됐고, 철기시대 초기 전국적으로 보급됐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곡물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떡은 명절 차례상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난으로 설에도 떡을 찌지 못해 슬퍼하는 아내를 위해 백결 선생이 거문고로 떡방아소리를 연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시대 때는 관혼상제 풍습이 일반화되면서 각종 행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음식이 됐다. 유교식 제사에는 떡을 네모난 편틀에 맞추어 썰어 올렸다. 기쁜 날 차리는 상에는 떡의 가짓수를 늘리고 높이 쌓아 올려 정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계절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발전하며 떡은 전성기를 맞았다.
떡 전문가들은 우리 떡을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라 말한다. 주재료인 찹쌀과 멥쌀에 팥, 호박, 견과류 같은 부재료가 어우러져 5대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빵보다 열량은 낮으면서도 포만감 있고 맛있다.
여러 장점에도 전통 떡이 외면 받는 큰 이유는 식생활의 변화에 있다.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70년 136.4㎏에서 지난해 61.8㎏으로 줄었다. 떡의 자리는 피자, 빵, 케이크가 대체했다. 빵은 보관 방법도 떡보다 쉽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는 “떡의 질감이 무겁다”고 지적했다. 빵은 곡물의 가루에 공기를 불어넣는 과정을 거치지만, 쌀가루는 글루텐이 없어서 발효가 어렵다. 현대인은 빵보다 무겁고 끈적한 떡의 식감을 즐기지 않는다. 이 평론가는 “전통 떡은 디저트로 즐기기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식사대용으로 먹기도 애매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떡을 디저트로 해석한 떡카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작은 떡을 낱개로 팔아 음료와 곁들여 먹는 식이다. 최근 떡의 변화는 더 과감해졌다. 제빵 재료와 기술을 혼합한 ‘퓨전떡’이 속속 나오고 있다. 떡과 빵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떡카롱·티라미슈 크림떡… 디저트가 된 퓨전 떡
최근 떡 시장은 디저트가 대세다. 질감은 기존보다 포슬포슬하게, 내용물은 제빵 재료를 첨가해 더 가볍게 만든다. 설기의 포슬포슬한 식감을 위해 쌀가루에 물 대신 두부를 넣거나 찐 콩을 갈아 넣기도 한다. 수제크림, 앙버터 등 떡 안에 들어가는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청년떡집’은 새로운 떡 개발에 앞장 서는 선구자 중 하나다. ‘청년떡집’이 선보인 떡은 ‘SNS 대란떡’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젊은 층에서 인기가 뜨겁다. 화제의 떡은 티라미슈 크림떡. 떡에 커피향을 더하고 마스카포네 치즈 크림을 채워 넣는다. 커피와 함께 먹는 디저트로 냉장을 하면 아이스찰떡처럼 즐길 수 있다. 티라미슈 크림떡은 출시 3개월 만에 SNS 관련 게시물이 3,000건을 넘었다. 한 달 매출액만 2억원이 넘었다.
‘청년떡집’의 이순영 팀장은 “선물하기도 좋아 추석을 앞두고 매출이 두 배 정도 오르고 있다”며 “퓨전 음식문화가 발달하면서 소비자가 티라미슈 크림떡도 부담 없이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퓨전떡 온라인 쇼핑몰 자이소는 마들렌과 마카롱을 변형했다. 이른 바 쌀 미(米)자를 쓴 미들렌과 떡카롱이다. 떡카롱은 동그랗게 빚은 설기 떡 사이에 크림을 채워 넣었다. 얼핏 보면 빵으로 착각할 정도도 정교하다. 아기자기하고 색깔도 다채로워 2030세대에서 선물용으로 각광 받고 있다.
플라워 떡케이크는 축하 자리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색소로 물을 들인 앙금으로 꽃을 만들어 동그란 떡케이크에 올린다. 서울 남성시장에 위치한 떡집 ‘정애맛담’의 플라워 떡케이크는 좀 더 특별하다. 설기 케이크 위에 앙금 꽃이 아닌 생화를 올린다. 주문이 있을 때마다 시장에서 손님이 원하는 꽃을 구입해 만드는 주문 제작 방식이다. 생화가 올라가니 보다 생동감 있고 화사하다. 김정애 ‘정애맛담’ 대표는 “손님들이 케이크에 꽃까지 선물 받는 기분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꽃을 다발로 묶어 장식하는 형식이라 케이크 위에 있는 꽃 장식을 흩트리지 않고 분리할 수 있어요. 이 꽃을 넓적한 화기에 살짝 얹어놓으면 며칠을 두고 볼 수 있죠.”
앙버떡·떡샌드위치… 떡 일상으로 스미다
퓨전떡집이 늘면서 선물용을 넘어서 간식이나 식사대용으로 떡을 찾아 먹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퓨전떡을 먹고선 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고 후기를 남기는 것이 하나의 놀이 문화가 됐다.
“선물이 아니라 제가 직접 먹으려고 구입했어요. 버터가 가득 들어간 떡이라니 궁금하잖아요.” 대학생 이희정(가명·26)씨는 최근 ‘정애맛담’을 찾아 앙버떡을 구입했다. 앙버떡은 팥앙금과 버터를 1대 1로 넣어 만든 앙버터빵에서 변형해 만든 떡이다. 빵 대신 설기 사이에 팥 앙금과 버터를 끼워 넣는다. 설기는 두부, 당근, 카스텔라 3가지 맛이 있다. 이씨는 “SNS를 보고 호기심에 구입했는데, 부드럽고 쫀득해 또 찾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동 떡 카페 ‘로야디’는 떡 샌드위치로 직장인을 공략한다. 설기 떡 사이에 햄, 양상추, 계란, 크래미 등 샌드위치 속을 그대로 끼워 넣는다. 설기 떡은 카스텔라와 비슷한 식감을 살리고 단맛을 조절해 속재료와 어우러지도록 했다. 떡 샌드위치는 야채, 감자샐러드 등 여느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재료를 다 활용할 수 있다. 김은송 ‘로야디’ 대표는 “4년 전 떡 장사를 시작했는데 최근 퓨전 떡집이 부쩍 늘었다”며 “익숙하지만 외면 받던 떡이 젊은 층에겐 색다른 먹거리로 다가간 것 같다”고 밝혔다.
김정애 ‘정애맛담’ 대표는 젊은 층을 겨냥할 새로운 상품을 개발 중이다. “선물용이 아닌 직접 드시러 오는 2030세대 손님들이 많아요. 떡도 흥미 있게 풀어내면 빵 못지않게 경쟁력이 있는 먹거리에요. 이런 식으로 퓨전 떡의 종류를 늘리면 더 많은 분들이 찾지 않을까 싶어요.”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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