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잇따라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정부가 가상화폐공개(ICO) 금지, 신규 가상계좌 발급 제한 등 가상화폐 시장에 부정적 시각을 견지하자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서다. 결국 국내 일자리 창출과 세원확보라는 좋은 기회를 정부 스스로 차버린 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24일 가상화폐 업계에 따르면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다음달 초 싱가포르에 ‘업비트 싱가포르’ 거래소를 공식 개설한다. 업비트의 해외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지법인은 지난 2월 설립됐다.
카카오에서 동남아 지역 사업을 담당했던 김국현 전 카카오 인도네시아 대표가 거래소를 이끈다. 김 대표는 “블록체인 산업을 육성하는 국가에 거래소를 열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며 “블록체인 산업 다각화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시작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두나무는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거래소 개설이 허용된 다른 국가에도 적극 진출한다는 방침이다.
또 다른 국내 대형 거래소 코인원도 지난달 2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코인원 인도네시아’를 설립하고 서비스를 시작했다. 차명훈 코인원 대표는 당시 “인도네시아는 코인원이 글로벌로 나아가기 위한 첫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빗썸도 지난 7월 일본 법인을 설립하고 일본 금융청의 가상통화 거래사이트 라이선스 취득을 준비하는 등 해외 지사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 규제에 국내선 성장 한계
이처럼 국내 거래소들이 잇따라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에 나서는 것은 정부가 가상화폐 거래소를 사실상 ‘투기장’으로 보고 각종 제재안을 들고 나오는 상황에서 국내 시장에만 머물러선 성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올 초 정부는 명의도용을 막고 투명한 금융 거래환경을 만들기 위해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받은 투자자에게만 가상화폐 거래를 허용하는 ‘가상화폐 거래실명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은행들이 신규 계좌 발급에 보수적으로 나서면서 중소형 거래소는 아예 은행과 계약조차 맺지 못하고, 대형 거래소 역시 은행의 눈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규 유입이 막히면서 거래소 시장은 연초 이후 사실상 답보상태다.
때문에 올해 1월만 해도 세계적인 가상화폐 거래소들을 제치고 거래액과 거래량 세계 1위를 기록했던 업비트는 21일 가상화폐 정보제공업체 코인마켓캡 기준 6위까지 밀려났다. 지난해 가상화폐공개(ICO) 금지에 더해 정부는 최근 가상화폐 거래소를 벤처기업 업종에서 제외하는 시행령까지 내놓은 상태다.
반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국가와 일본 등 일부 해외 국가에서는 ICO를 합법화하는 등 관련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싱가포르를 첫 해외 진출지로 선택한 것도 싱가포르 금융당국이 글로벌 블록체인 허브 국가를 표방하며 관련 산업을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란 게 두나무의 설명이다.
실제 ICO 관련 규제 샌드박스(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규제 없이 사업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 싱가포르는 스위스와 함께 ‘ICO의 성지’로 불리며 관련 기업과 투자자를 속속 유치하고 있다. 또 가상화폐 거래소에도 신원확인절차(KYC)와 자금세탁방지(AML) 규제 준수를 요구하고 있다. 이석우 두나무 대표는 “한국 정부 규제가 심해 동남아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국내 거래 환경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면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어 해외 거래소 진출을 선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탈한국으로 인재ㆍ국부유출 우려도
이 같은 상황이 결국 인재와 국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잖다. 가상화폐를 시스템 안으로 편입하지 않아 지금처럼 거래소 해외진출 행렬이 이어진다면 사업 주도권을 해외사업자에게 뺏기게 되고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창업가와 전문 기술자가 해외로 나갈 수 밖에 없다.
한국블록체인협회 관계자는 “최근 악화되는 고용지표와 달리 거래소는 전략적, 경쟁적으로 우수 인재와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며 “초기 15~20명으로 시작한 거래소가 9개월 만에 직원 800명을 채용하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등 고용유발 효과가 큰데도 거래소를 사행성 산업으로 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상화폐 거래소뿐 아니라 국내 ICO 금지로 인한 신생혁신기업(스타트업)의 탈 한국 행렬도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 올 초 정부가 국내에서 ICO 금지 엄포를 내리면서 ICO를 추진하려는 한국 스타트업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ICO전문 분석업체 ICO레이팅 보고서에 따르면 2분기에만 싱가포르에 57개의 ICO법인이 생겼는데 이 중 16개가 한국인이 주축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ICO를 위해 해외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법률자문과 직원 등을 고용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이 비용이 모두 해외로 흘러나가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김형주 한국블록체인사업협회 이사장은 “해외로 나가면 법인 설립에 2억원, 고문단을 꾸리는데 1억원, 현지 사무실을 여는데 3억원 등 최소 11억~12억원이 유출되는 것”이라며 “ICO를 통해 유치한 금액에 대한 세금과 변호사, 전문가 고용창출 비용까지 합친다면 천문학적 비용이 해외로 새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가상화폐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선 관련 세미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이를 듣기 위해 해외에서도 한국을 찾는데 정작 우리 정부는 규제로만 접근하고 있다“며 “관련 규제를 풀어 세계적인 기업과 인재가 오히려 한국으로 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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