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여자에게 유독 잔인했다. 엄마는 술만 마시면 어린 그를 때렸고 결국 버려둔 채 떠났다. 열여덟 무렵엔 성폭행에 저항하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사람을 찔러 전과자가 됐다. 세상이 할퀴어 피맺힌 자리마다 가시가 돋았다.
자신을 버려두듯 마음을 닫아 버린 여자 앞에 어느 날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때 낀 홑겹 옷과 헝클어진 머리칼, 깡마른 몸에 얼룩진 멍 자국… 숨소리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밤, 아이는 황량한 골목 끝 어둠 속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여자의 눈길은 어둠을 헤집고 아이에게 가 닿았다.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너한테 가르쳐 줄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없어. 이런 나라도 같이 갈래?”
영화 ‘미쓰백’(11일 개봉)은 상처 입은 두 영혼의 교감을 사려 깊게 보듬는다. ‘미쓰백’이란 호칭에 자신을 감추고 살아온 백상아(한지민)가 학대당하는 아이 지은(김시아)을 만나 서로 치유하는 이야기가 먹먹하게 그려진다. 2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한지민(36)은 “상처 입은 상아와 지은이 안쓰러워서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말간 목소리에는 ‘미쓰백’을 힘껏 품었던 가슴의 온기가 실려 있었다.
상아를 표현하기 위해 한지민은 시나리오에 담기지 않은 상아의 지난 시간을 되감아 내면에 차곡차곡 쌓았다. 엄마에게 버려진 뒤엔 홀로 어떻게 살았을까, 전과자로 낙인 찍힌 삶은 어땠을까, 자신의 곁을 맴도는 형사 장섭(이희준)에 대한 감정은 무얼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한지민은 “상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극 중에서 욕을 하고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그 모습이 상아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민의 눈에 비친 상아는 “보호받지 못하고 자라서 겉만 어른인 아이”였다. “지은을 향한 감정도 모성이 아닌 연대였을 것”이라고 했다. “상아는 지은이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마냥 기쁘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같이 가자’는 말을 건네 놓고도 속으로는 무서웠을지 몰라요. 영화를 찍으며 저도 많이 아팠어요. 상아가 지은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뒤 장섭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토해 내는 장면을 촬영하고는 오래 힘들었어요.”
‘미쓰백’은 연출자 이지원 감독이 학대 피해가 의심되던 옆집 아이를 돕지 못했던 과거 경험과 죄책감에서 비롯됐다. 카메라는 우리 사회의 보호망이 얼마나 허술하고 편의적인지도 놓치지 않고 담아 낸다. 영화 안에서도 상아와 지은을 구원하는 건 장섭과 장섭의 누나(김선영)로 이어지는 연대의 사슬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제도와 법이 올바르게 작동한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죠. 불편하더라도 외면해서는 안 될 현실이에요. 그래서 관심이 중요해요. 관심 어린 시선들이 모이고 모여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요. 영화의 힘이 현실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30대 한복판에서 만난 ‘미쓰백’은 한지민에게 인장으로 남았다. “앞으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주저하지 않을 용기를 얻었다”고도 했다. 상아로 살았던 시간이 한지민을 단단히 여물게 한 듯했다. “요즘엔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느껴요. 심지어 수다스럽다는 얘기까지 듣는 걸요. 작품을 보는 눈도 바뀌었죠. 예전의 저는 여리고 불안정했어요. 데뷔 초엔 좀 덜 혼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기했고, 한때는 서로 다른 작품인데도 비슷한 연기 톤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죠.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현재를 살지 못했던 거예요.”
최근 종방한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도 한지민에게는 청량음료 같은 작품이었다. 육아와 가사, 일에 치이는 여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그는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갈증을 이 드라마가 풀어 줬다”며 “비슷한 캐릭터라도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지민의 다음 발걸음은 대선배 김혜자와 함께하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이어진다. “무척 영광스럽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며 한지민이 한껏 들떴다. “현재를 살자”는 좌우명을 가진 한지민이 그려낼 “현재”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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