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마른 단풍잎을 발견했다. 누가 언제 끼워두었는지 알 수 없는 낙엽 책갈피, 뜻밖에 찾아온 낭만이 반가워 미소를 지었다.
새 책 속엔 없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든 비상금이든 오래된 무언가를 우연히 뱉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헌책뿐이다. 책장 사이에 뭔가를 끼워두고, 끼워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오랜 시간 누군가의 서가에 꽂혀 있던 묵은 책.
헌책은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의 추억을, 그리움을, 경험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퍼 나른다. 연인에게 선물한 책 면지에 적힌 손글씨에서 사랑의 감정을 대리 경험하거나 수인번호가 적힌 교도소의 도서 열독 허가증, 뜻을 알 수 없는 사주풀이 메모를 통해 원 주인의 정체를 짐작해 보는 재미도 있다. 낡은 코팅 책갈피와 한물간 유명 가수의 공연 티켓으로는 찰나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매입한 헌책에서 나온 물건들을 SNS에 소개해 온 이효진 한뼘책방 대표는 헌책의 매력을 “우연히 발견한 그 무엇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경험을 엿보는 재미”라고 표현했다. 아름다운가게의 중고서점 ‘보물섬’은 아예 기증받은 책에서 나온 물건들을 모아 매장에 전시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낸 이범택 간사는 “낡고 오래된 물건을 쉽게 버리는 요즘 헌책에 실려 온 추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강조했다.
이제 이 가을, 헌책에 실려온 소소한 추억들을 엿볼 차례다.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랑의 순간
“많은 설레임을 안고서 너에게 책 한 권을…” 아마도 혁은 윤경을 사랑했나 보다. 조심스럽고 은근한 고백을 책 한 권의 선물로 대신한 혁은 “너와 함께 있을 때 세상은 나와 같이 있음을 느낀다”라고 면지에 꾹꾹 눌러 적었다.
시작하는 연인들이 남긴 흔적은 26년 세월을 뛰어넘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1991. 7. 10’이라는 날짜를 본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우연히 펼쳐 본 헌책에서 27년 전 손글씨를 발견한 류은아(30)씨는 “누군가의 사랑의 순간을 엿본 것 같았다. 한때 이런 방식의 고백을 사랑했는데…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말했다. 가수로 활동 중인 류씨는 최근 헌책에 적힌 손글씨를 모티브로 곡을 만들기도 했다.
#시간 여행으로의 초대장
메모지의 ‘곡명’란이 유난히 넓다. 하단에 ‘젊음에 음악감상실’이라고 찍혀 있고, 날짜가 ‘198…’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 언저리에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청곡을 적어내면 DJ가 사연과 함께 노래를 틀어주던 그때 그 시절, 메모지의 주인은 아마도 음악감상실을 자주 찾는 철학도였나 보다.
그가 프로이트의 ‘실수의 분석’이란 책에 끼워둔 메모지를 발견한 이는 1988년생 김민혜씨. 그는 메모지를 가리켜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던 것 같다”라고 짐작했다. 그리고는 “내 손으로 펼쳐 읽고 있는 같은 책을 누군가가 내가 있어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봤을 거라 생각하니 신기하면서도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시간 여행을 좀 더 실감하고 싶었던 그는 “전화번호랑 상호로 검색해 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라며 아쉬워했다.
#행운을 선물 받다
“불현듯 찾아온 행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허윤정(30대)씨는 얼마 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책 ‘모던 수필’을 읽다가 바싹 마른 네잎 클로버를 발견했다. 허씨는 “수분을 버리고 낭만을 머금은 네잎 클로버의 자태가 함초롬했다”라며 “어렵게 구한 책 속에 평소 좋아하는 문인들의 글과 함께 네잎 클로버까지 끼여 있다니, 마치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행복했고 전 주인이 참 고마웠다”라고 전했다.
#추억을 샀더니 헌책이 딸려왔다
윤재헌(27)씨가 지난해 6월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구입한 최영미의 시집은 23년 전 누군가 건넨 이별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책 면지엔 “가면서 읽고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래”라고 적혀 있었다. 실연의 아픔을 앓던 윤씨에겐 책에 수록된 시보다 면지에 적힌 메시지가 더 눈에 띄었다. 그는 “그땐 외로워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이 시집을 골랐는데 읽을수록 너무 뜨겁고 재처럼 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보다 시집에 남은 누군가의 추억, 평범한 메시지가 내가 원했던 따스한 느낌에 더 가까웠다”라며 “추억을 샀더니 헌책이 딸려온 셈”이라고 말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
“편지를 보자마자 잊고 지내던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에게 썼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최근에 찾은 윤혜경(45)의 말이다. “며칠 뒤에 보내야지”하며 소설책 ‘그리스인 조르바’에 끼워둔 채 까맣게 잊은 편지는 26년 후에야 헌책방을 운영하는 지인에 의해 ‘발굴’됐다. 젊은 시절 읽던 책을 한꺼번에 헌책으로 처분한 지 며칠 안 돼서다.
윤씨는 “당시 대학 1학년이던 나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있었고 소영이는 노량진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때”라며 “먼저 대학생이 된 나로서는 재수하는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연락하기가 왠지 쉽지 않은 미묘한 시기였다”라고 회상했다.
‘절친’이었던 소영은 그 사이 연락이 끊겼다. 윤씨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안타깝지만 26년 만에 발견한 편지처럼 언젠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이 기사를 소영이가 보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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