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最古) 사찰, 강화 역사의 축소판 전등사
강화의 종교 유적에서 전등사를 빼놓을 수 없다. 전등사는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강화읍내에서 15km 떨어진 곳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생채기가 남은 전등사는 강화도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창건해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온다. ‘전등본말사지’의 기록대로라면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 것보다 3년 빠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일부에서는 당시 강화도가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는데, 고구려 연대가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김형우 안양대 교수는 “한강 유역이 나라의 중심지였기에 강화도를 경유하여 불교가 전해진 사실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백제의 수도에서 불교가 공인된 384년보다 3년 앞서 강화도에 절이 창건된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강화도 지오그래피, 함민복 외 16인 지음, 작가정신). 진종사는 후에 고려 충렬왕(1274~1308년 재위)의 왕비 정화궁주가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했다 해서 전등사(傳燈寺)로 개명했다.
전등사에는 일반 사찰과 달리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남문 매표소에서 오르면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 삼랑성 ‘종해루(宗海樓)’다. 삼랑성은 솥 단지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는 정족산 능선을 두르고 있어 ‘정족산성’으로도 부르다 문화재청 고시로 2011년 7월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대조루를 통과해 마주하는 대웅전 건물은 안팎에 희비극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대웅전 네 모서리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벌거벗은 조각이 추녀를 떠받치고 있다. 절을 짓던 도편수가 사랑하던 여인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하자, 평생 배반의 죄값을 치르라는 의미로 벌을 주는 조각을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전설은 대웅전 안내판에도 버젓이 적어 놓았는데, 웃어 넘기기에는 좀 찜찜하다. 아무려면 대목수가 큰 사찰의 대웅전을 짓는 공사에 불경스럽게 개인의 복수심을 새겨 넣었을까. 벌거벗은 조각인 것은 맞지만, 딱히 여인이라 볼 근거도 희박하다. 동편 두 모서리의 조각은 각기 한 팔을 내리고 쉬는 모습이어서 도편수 자신이나 인부들의 고단함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오히려 맞을 듯하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마니산 자락 정수사에서 판각해 옮겨진 법화경 목판 104매를 보관하고 있는데, 불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길을 끄는 것은 대들보와 기둥마다 빼곡하게 먹으로 적은 이름들이다. 정족산성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 500여명의 병사가 매복했다가 프랑스군을 대파한 곳이다. 이때 출정을 앞둔 군사들은 전등사 대웅전 기둥마다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불교의 힘을 빌려 전투에서 승리하고 살아 남기를 바라는 절절한 바람과 결전의 각오가 읽힌다.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병사들의 두렵고 서글픈 모습도 보인다. 죽음보다 두려운 건 잊혀지는 것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밤, 그 이름 석 자를 쓰는 심정을 헤아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다행히 양헌수 부대의 작전은 대성공을 거뒀고, 6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한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양헌수 부대는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했다. 전등사 동문 부근에 그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전등사 범종도 웃지 못할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중국 송나라의 종이다. 원래 종은 일제에 공출당하고, 해방 후 부평 병기창에서 대신 가져온 쇠 종이 중국 허난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에 주조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평가받은 것이다.
대웅전에서 왼편 언덕을 약 100m 오르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사고 터가 복원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은 실록 사고본은 묘향산사고와 강화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1년(1660)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후 다시 서울로 옮겨졌고,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후 소실된 정족산사고는 1998년 장사각과 선원보각 두 건물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산성이 사찰을 둘러싸고부터 전등사는 세속의 풍파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 숨가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겨울로 접어드는 전등사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대웅전 앞마당의 400년 된 느티나무도, 대조루 옆의 280년 된 단풍나무도 그윽하게 시간의 운치를 더한다. 종해루로 되돌아 나오는 길에 오를 때 보지 못한 작은 돌다리가 보인다. 안내판도 없고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인데, 네 귀퉁이에 선 해태상이 앙증맞다. 전등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 듯, 서로 눈길을 마주하고 있다.
강화=글ㆍ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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