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난독증 환자
※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한 두 가지 측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자신의 불편은 크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화요일 한국 사회에서 유독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웹디자이너 송현숙(30ㆍ가명)씨는 지난 7월 10개월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1년을 채 버티지 못한 채 직장을 나온 것은 난독증 탓이다. 여느 신입사원이 그렇듯 송씨 역시 업무매뉴얼을 빠르게 익혀 직무에 적응하려 했다. 그러나 같은 글을 읽어도 남들보다 3배는 더 시간이 걸리는 탓에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상사ㆍ동료와의 소통도 문제였다. 사내에서는 업무지시를 이메일로 주고받았는데, 때로 장문의 지시가 오면 이를 정확히 읽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다. 자연스레 송씨의 업무속도는 동료들보다 한참 뒤쳐지게 됐다.
사실 송씨도 어렵게 구한 직장을 지키고 싶어 몰래 야근을 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했다. 때때로 디자인이 좋다는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난독증에 대한 동료들의 편견 때문에 도무지 버티기 힘들었다고 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동료들이 송씨에 대해 ‘난독증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맨날 게으름만 피우는 것 아니냐’고 뒷담화를 하는 것을 들은 것이었다. 송씨는 “나 같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보통 사람들만큼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없는데 대부분 이를 모르고 ‘학창 시절에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는 핀잔만 준다”며 “디자인 실력만으로는 일반 직장에서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전공마저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이 읽는 ‘코끼리’라는 단어가 ‘리끼코’, ‘끼코리’ 등 이상한 형태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난독증 환자들이다. 난독증은 두뇌의 언어ㆍ읽기 기능과 관련된 영역의 신경회로 배선이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증상이다. 이들은 시ㆍ청각은 물론 지능에도 이상은 없지만, 오직 무언가를 읽는 데서만 어려움을 겪는다. 난독증 환자 김선호(35ㆍ가명)씨는 이를 “모두가 ‘윈도우’를 운영체제로 사용하는 세상에서 홀로 ‘리눅스’라는 다른 운영체제를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입력ㆍ작업방식이 다를 뿐 무엇을 사용하든 컴퓨터는 작동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모든 언어가 ‘윈도우’를 중심으로 맞춰져 있는 세상에서 ‘리눅스’들이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특히 문맹률은 낮고 학습수준은 높은 우리 사회에서 ‘글을 읽기 어렵다’는 난독증 환자의 고통은 ‘무식’으로 치부되거나 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 단순 문해력 문제 아닌데..
우리나라에 난독증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인지를 조사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난독증이 있어도 그 사실을 숨기려 하거나, 자신이 난독증인 것을 모른 채 그저 ‘머리가 나쁘다’고 체념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2015년 전국 154개교를 표본으로 실시한 ‘난독증 현황파악 연구’가 국내 난독증에 관한 첫 현황 파악이다. 이에 따르면 조사대상 초등생 8,575명 중 4.6%가 난독증 또는 난독증 위험군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난독증이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사람들은 종종 ‘문해력 부족’과 난독증을 혼동한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뜻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다양한 글과 책을 반복해 읽으면서 계발이 가능하다. 반면 난독증은 글자 자체가 뒤섞여 보이는 증상인데다 선천적 질환이라 완벽한 개선은 어렵다. 전혀 다른 두 증상이 혼동되면서 난독증이라는 단어는 줄곧 낮은 지식수준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이곤 한다. 최근 들어 인터넷 댓글 창에서 흔히 보이는 ‘난독증이냐? 글을 똑바로 읽어라’ 등의 조롱이 그 예다. 최다은(26ㆍ가명)씨는 “글을 읽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면 ‘평소에 책 좀 읽으라’는 핀잔이 돌아온다”며 “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지식을 쌓는걸 좋아하는 편인데 단지 잘 못 읽는다는 이유로 무지한 사람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 좌절하는 어린 시절
난독증 환자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 같은 편견에 맞서야 한다. 한글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증상이 눈에 띄게 되는데, 난독증을 잘 알지 못하는 교사들은 이를 흔히 학습부진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난독증 자녀를 둔 학부모 김선희(40ㆍ가명)씨는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 시험에서 늘 빵점을 받고 부끄러워해서 방학 내내 붙잡고 연습을 해 한 두 개 정도는 맞추게 됐다”며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선생님들은 여전히 우리 애를 ‘공부 못하는 애’, ‘엄마가 방치하는 애’로만 봤다”고 말했다.
학습 과정에서의 좌절도 흔한 일이다. 학부모 이미선(45ㆍ가명)씨는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난독증 사실을 미리 알렸다. 아이의 상황을 고려해서 수업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 이씨는 충격을 받았다. 아이가 수업시간에 문제를 잘 풀지 못하자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너는 공부를 접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특히 부모가 자녀의 난독증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 학습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사교육에 의존하는데 이 과정에서 학습의욕을 더욱 잃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2010년부터 난독증도 학습장애로 분류돼 특수교육대상에도 포함된 건 다행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특수교육대상자로 인정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한다. 병원에서 난독증 진단을 받아 시도교육청에 제출해도 대면 진단ㆍ평가에서 일부 단어를 읽거나 지능지수(IQ)가 70 이상이면 학습장애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렵사리 특수교육대상자로 인정을 받더라도 혜택은 크지 않다. 주로 전문기관에서 난독증 치료를 받을 때 쓰도록 바우처가 제공되지만 교육청이 지정한 기준과 맞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부모 서유경(37ㆍ가명)씨는 “난독증 전문치료 상담실 건물에 지체장애인용 오르막이 없다는 이유로 바우처를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학교 내 도움반(특수교육반)에 들어가려 해도 난독증에 대해 잘 아는 특수교사가 드문데다 ‘다른 지적장애 학생과 공부하기엔 지능이 높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기 일쑤다.
◇ ‘정상’ 도 아닌 ‘장애’도 아닌
이처럼 ‘학습장애’는 맞지만 ‘장애’는 아닌 애매한 지위는 난독증 환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특히 학습의 핵심적인 과정인 ‘평가’에서 어떤 배려도 받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지난 7월 한국난독증협회 등 관련 단체들은 난독증 학생들을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시간을 연장을 허용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기했다. 난독증이 특수교육대상으로 분류됐지만 정작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상 장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험특별관리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이 차별이라는 것이다. 진정을 대리한 염형국 공감 변호사는 “난독증 학생들은 장기간의 특수교육이 수반돼야 학습능력을 유지할 수 있고 일상ㆍ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만큼 이들에게도 시험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영화 한국난독증부모모임 대표는 “꼭 시험시간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감독관이 시험문제를 읽어줄 수만 있다면 이를 듣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맞춤형’ 지원은 수능은 물론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증 시험, 심지어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전무하다.
일상을 도와줄 도구 개발도 지지부진하다. 소리로 듣는 게 읽기보다 편한 난독증 환자들은 때로 시각장애인용 도구들을 사용해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증상이 부각되는 탓에 오히려 불편을 겪었다고도 한다. 김선호씨는 업무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하지 못하거나 잘못 읽은 탓에 눈총을 받게 되자 고민 끝에 시각장애인용 스마트폰을 구했다. 어색한 억양이지만 모든 메시지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덕에 처음에는 꽤나 편리하게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이목이 집중되는데다 주변인들도 ‘눈에 문제가 있냐?’며 캐물어 며칠 쓰지 못한 채 처분해야 했다.
◇ ’천재들의 병’ 오해는 오히려 족쇄
난독증 환자들에 대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편견은 난독증이 ‘천재들의 병’ 이라는 것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난독증 환자 중엔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들이 있다.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나 배우 톰 크루즈 같은 예술인 중에도 난독증 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 줄곧 ‘난독증 환자들은 창의력이 뛰어나다’는 식으로 조명된다.
이런 인식이 좋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사자들은 유명인들의 성공스토리만을 부각시킬수록 난독증이 ‘노력’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같아 달갑지 않다고 말한다. 박주환(24)씨는 “난독증이 있다고 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닌데다 유명인들 역시 난독증 극복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을 텐데 사람들은 쉽게 간과한다”며 “’너도 천재일지 모른다’라는 허황된 격려보다 읽는데 서툴더라도 기다려주는 배려가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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