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36> 파라오 미라 12기가 한 방에 단체합숙
카이로의 이집트박물관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몇 발자국 떼니 벼루처럼 생긴 커다란 돌판이 통로 한가운데 버티고 있었다. 길이가 2m를 좀 넘는 허리 높이의 돌판은 직사각형과 반원 형태로 구분돼 있고 그 사이에는 작은 구멍도 하나 있었다. “삼겹살 굽는 돌판 닮았다. 기름 빠지는 구멍도 다 있네”라는 한국인 관광객의 그럴싸한 추리에 주변이 웃음바다가 됐다. 하지만 이 돌판은 삼겹살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바로 미라를 만드는 작업공간이었다. 돌판 위에서 장기를 빼내고, 약품처리를 해서 아마포를 감으면 미라가 되는 것이었다. 구멍은 피가 흘러내리는 통로였다.
쿠푸피라미드 내부의 왕의 방까지 들어가본 지난해 12월8일, 카이로에서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쿠푸에다 나폴레옹이 보고 감동했다는 스핑크스를 본 것만으로도 이미 이집트 여행의 최고봉을 맛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이집트 민주화의 성지인 카이로 티흐리르 광장 한켠의 이집트박물관에서 쿠푸와 맞먹는 경이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에는 생명력이 없는 것 같아 발길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냥 지나쳤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노릇이었다.
어디를 가나 테러주의보였다. 2개의 관문과 투시기를 겨우 지나서야 박물관 입구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이집트 1왕조 초대왕 메네스의 ‘나르메르 팔레트’와 6층 짜리 계단식 피라미드의 주인공인 3왕조 조세르의 좌상 등 이집트 역사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들의 유물이 끝도 없었다. 메네스가 기원전 3,100년 시대의 인물이니 5,000년 전이다.
파라오의 석상, 얼굴, 서기의 석상, 목관, 석관, 미소를 띈 스핑크스, 왕 이름을 표기한 상형문자 카르투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물 앞에 관람시간은 짧기만 했다. 15만점이 있다는데 전시공간이 부족해서 3만여 점은 수장고에 처박혀 있다고 했다.
2층 한 켠은 아예 소년왕 투탕카문의 독무대였다. 소년왕이 앉았던 동물 모양의 황금의자, 창을 든 소년 파라오의 상, 투탕카문의 장기를 담았던 항아리도 보였다.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든 까닭은 육체를 잘 보존해야 영혼이 돌아와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라를 만들면서 4개의 항아리에 간과 위, 폐, 그리고 내장을 따로 담았지만 심장만큼은 몸에 그대로 뒀다. 망자가 아누비스를 따라 죽음의 신 오시리스 앞으로 가면 저울 양쪽에 심장과 지혜의 신 마트의 깃털을 단다. 그때 망자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저울이 기울면 괴수인 암무트가 달려나와 심장을 먹어치우게 된다. 그것으로 망자의 부활길은 막히는 것이다. 심장이 부활의 잣대인 것이다.
사후세계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겼던 이집트인들에게 이에 대한 대책이 없을 리가 없었다. 신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주문과 비법이 ‘사자의 서’ 형태로 무덤에 같이 묻혔다. 부활용 정답책자인데, 실전용 커닝페이퍼 성격이 짙다.
황금마스크로 유명한 투탕카문은 1922년 11월 룩소르 ‘왕가의 골짜기’에서 영국인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견됐다.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으로 암울하던 지구촌은 소년왕의 발견 후 투탕카문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그의 비극적인 삶도 한 몫 했다. 10살 나이에 파라오가 된 그는 19살에 사망한데다 미라 X-선 촬영 결과 머리 부분에서 작은 뼈의 단편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타살설까지 제기된 터였다.
게다가 발굴 후원자인 카나본경이 몇 달 후인 1923년 4월 사망했고, 무덤에 가장 먼저 들어갔던 영국계 이집트 고고학자 화이트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더니 목 매달아 자살하면서 파라오의 저주는 세계인의 화두가 됐다. 믿거나 말거나 당시 언론도 ‘투탕카문의 저주’라고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발굴자인 하워드 카터는 1939년까지 17년을 더 살았으니 저주는 소설이었다.
쿠푸에 필적하는 경이감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투탕카문을 거쳐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앞에는 이상한 공간이 있었다. 여기 입장하려면 돈을 따로 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Royal Mummies’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왕가의 미라면 파라오? 물어봤더니 파라오의 미라가 맞다고 했다. 그 옛날 이집트를 호령했던 파라오의 미라를 직접 눈으로 본다는데 추가 입장료 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입구까지 미라 만드는 방법과 장기를 담았던 항아리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크지 않은 문으로 들어갔더니 초등학교 교실보다 작은 공간에 이중 ‘ㄷ’ 자 형태로 미라 12기가 전시돼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중앙아시아를 다니면서 ‘누란의 미녀’ 미라도 봤고,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의 미라도 본 터였다. 하지만 파라오 미라의 이름을 본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람세스 2세와 그의 아버지 세티 1세, 이집트 최초의 여왕 하트셉수트, 그의 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와 양아들이자 사위인 투트모세 3세 등 이집트 신왕조의 내노라하는 파라오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세티 1세가 닦은 터전 위로 제국을 건설했던 람세스 2세는 붉은 머리카락에 매부리코였다. 유리로 된 투명관을 사이에 두고 50㎝ 거리로 마주본 그가 바로 재위 67년간 이집트를 호령한 인물이었다. 단순 계산으로 3,300년 전 사람이었다.
그가 1974년 프랑스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적이 있었다. 미라 내 곰팡이를 없애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이집트 정부가 그를 위해 만든 여권을 보면 생년월일은 ‘1303 BC’, 직업은 ‘King’으로 기재돼 있었다.
투트모세 1세의 딸인 하트셉수트는 이복동생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지만 건축가 센무트와 썸을 탔다. 배다른 아들인 투트모세 3세가 왕위를 차지할 기미가 보이자 그를 아몬대신전으로 쫓아버리고 직접 이집트를 다스렸다. 문화와 건축, 교역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던 그도 하루 아침에 이집트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미라로 만날 줄은 몰랐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투트모세 3세는 20년간 17회 원정에 나서면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영토를 넓힌 파라오로 기억되고 있다.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파라오 미라관은 촬영금지였다. 하지만 파라오들을 한꺼번에 만난 그날의 감동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이집트 정부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기자피라미드 지구에 곧 대박물관을 새로 연다. 파라오들이 좁은 방에서 단체합숙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글ㆍ사진=전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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