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희 분장감독 국내 첫 분장전
‘안시성’ ‘남한산성’ ‘광해’ 등
8년간 영화 15편서 선보인
장신구ㆍ분장 소품 등 500여점
“남한산성서 대립한 김윤석ㆍ이병헌
관자장식 크기로 성향 나타냈죠”
영화 ‘안시성’(2018)을 다시 관람하게 된다면 주인공 양만춘(조인성)의 상투관에도 한번쯤 눈길을 주면 어떨까. 백성들과 함께할 때는 상투관의 비녀 장식이 아래를 향하고, 당나라 대군과 전투를 벌일 때는 하늘을 찌를 듯이 위를 향한다. 상투관 비녀는 양만춘의 심리까지 대변한다. ‘남한산성’(2017)에서 팽팽하게 대립한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과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도 망건에 달린 관자 장식으로 성향을 드러낸다. 강경파인 김상헌은 위압적으로 느껴지게끔 큰 관자를 달았고, 최명길은 그보다 작은 크기로 온건파 성향을 강조했다. 스크린에 강렬하게 새겨진 한국 영화의 ‘얼굴’들은 이렇듯 아주 작은 디테일들이 모여 완성됐다.
‘안시성’과 ‘남한산성’을 비롯해 ‘박열’(2017) ‘사도’(2015) ‘역린’(2014)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 숱한 영화에서 ‘얼굴’을 창조해 온 조태희(40) 분장감독이 한국 최초로 분장 전시회 ‘영화의 얼굴 창조전’을 열었다. 2012년부터 8년 간 영화 15편에서 선보인 장신구와 분장 도구 500여점을 4월 23일까지 선보인다. 2일 전시장인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만난 조 감독은 “분장이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재가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오랜 시간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사극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상투와 가발, 수염은 물론이고 장신구까지 손수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촬영 때 한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소품이라도 다른 영화에 절대 재활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사극 분장 소품이 다수 전시돼 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 조 감독은 “고증도 중요하지만 영화적 창의성을 우선시한다”고 했다. “‘역린’이 개봉했을 땐 대학 교수님들한테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궁녀들이 머리에 얹는 베씨댕기를 한복원단으로 만들었는데,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거죠.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웃음). 물론 영화에 따라서 고증에 충실해야 할 때도 있죠. ‘사도’ 같은 경우엔 이야기 자체가 역사 기록에 기반하기 때문에 분장도 80% 가까이 고증을 따랐습니다.”
분장은 ‘무게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이 착용한 용 비녀의 경우 유명 피규어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무게를 10분의 1로 줄였다. 조 감독은 “아무리 디자인이 예뻐도 무게 때문에 피로감을 느낀다면 배우가 연기할 때 방해를 받는다”며 “단 1g이라도 더 덜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감독이 생각하는 ‘좋은 분장’은 “관객의 기억에 남지 않는 분장”이다. “분장은 배우들의 연기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합니다. 장신구나 특정 이미지가 튀어서 그리로만 눈길이 간다면 잘못된 거죠. 분장 팀의 노력을 관객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조 감독은 고교 시절 우연히 TV 프로그램에서 본 드라마 분장 스태프의 모습에 매료돼 이 길을 택했다. 분장전문학원을 다니던 중 실습으로 참여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 촬영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감흥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에 분장 스태프로 참여하며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고 이후 17년간 한우물만 팠다. 조 감독은 “직업을 바꾸고 싶다거나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며 “공들인 영화가 개봉했을 때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은 분장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다. 조 감독은 “작업 환경이 녹록하지 않아 영화계를 떠나는 후배들이 많다”며 “할리우드처럼 일흔 살, 여든 살까지 현장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부터 현대까지, 왕부터 천민까지, 시대와 인물을 아우른 그에게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배우는 누굴까. “이병헌씨에게 한 번쯤 변발 분장을 해보고 싶어요. 좋은 작품을 만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병헌씨는 변발을 해도 굉장히 멋있을 겁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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