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목록에 왠지 반가운, 하지만 낯선 이름이 있다. 한국 감독 정다희(37)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움직임의 사전’이다. 감독주간은 실험적인 영화들을 발굴하는 칸영화제 비공식부문 중 하나로, 켄 로치, 짐 자무시, 조지 루카스 등 세계적인 명장들이 첫 장편영화를 선보인 곳이다. 정 감독은 2014년 ‘의자 위의 남자’로 감독주간을 찾은 데 이어 5년 만에 두 번째 초청장을 받았다. 20일(현지시간) 칸에서 정 감독을 만났다.
‘움직임의 사전’은 느림과 빠름 같은 ‘속도’ 개념을 5개 섹션으로 나누어 나무, 동물, 어른, 아이 등 다양한 캐릭터로 표현한 작품이다. 느리게 걷는 나무와 빠르게 달리는 사람, 쏜살같이 뛰어나가는 강아지 등 서정적이고 개성 있는 작화와 캐릭터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리듬이 관객에게 신선한 감각적 체험으로 다가온다. 칸영화제 감독주간은 이 영화를 “시적이고 철학적이다”라고 평했다.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바오밥나무는 0.008㎜ 자라고, 개 그레이하운드는 12㎞를 달리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1만8,000㎞ 돈다. ‘움직임의 사전’ 상영 시간은 10분이고, 나는 하루 2초를 만들었다.” 정 감독이 설명하는 ‘움직임의 사전’ 시놉시스다. “한 친구가 저에게 ‘너는 너무 빨라서 맞춰 가기 힘들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반면 또 다른 친구 저에게 ‘굼뜨다’고 하고요. 속도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걷다, 보다, 일하다, 달리다, 멈추다’ 같은 동작을 만든 다음 다양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속도를 표현해 봤어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중 ‘거리가 달라지면 시간이 달라진다’는 내용에서도 영감을 받았어요.”
정 감독은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 주제로 영화 안에 표현된 시간 속 운동, 공간 속 운동 등을 연구했는데, 그 논문도 이번 영화에 모티브가 됐다. 정 감독은 “단편 애니메이션이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 적합한 표현 방식 같다”고 말했다.
‘움직임의 사전’에는 움직임과 소리는 있지만 대사는 없다. 그런데도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듯이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 영화는 몸으로 하는 이야기니까요. TV나 극장 애니메이션 말고는 한국에선 다른 애니메이션을 볼 기회가 별로 없지만, 영화제에 가 보면 아주 다양한 작품이 많아요. 많은 분들이 찾아보셨으면 좋겠어요.”
‘움직임의 사전’ 상영 시간은 10분이지만, 제작 기간은 2년이다. 작화에만 1년 걸렸다. 종이에 목탄과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그래픽으로 채색했다. 종이를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높이가 50㎝를 훌쩍 넘는다. 정 감독은 “애니메이션 치고는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정 감독이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꾼 건 홍익대 2학년 재학 시절이다. 수업 시간에 시각디자인과 관련해 애니메이션을 배우면서 수업 자료로 접한 러시아 단편 애니메이션에 매료됐다. 졸업 뒤 광고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결국 꿈을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 석사 과정 졸업작품인 ‘나무의 시간’(2012)은 인디애니페스트 대상을 받았다. 졸업작품을 심사한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프랑스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해 만든 ‘의자 위의 남자’(2014)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빈방’(2016)은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을 받았다. 이번 영화 ‘움직임의 사전’도 칸영화제에 이어 다음달 열리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단편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정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원화들로 전시회도 열곤 한다. 애니메이션은 모든 장면과 모든 순간들이 그 자체로 완성된 회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유령 같은 것이잖아요. 기계를 켜면 나오고 끄면 없어지고요. 그런데 손으로 그린 낱장 이미지는 만질 수 있고 전시될 수 있어요. 종이에 그린 그림은 물질이지만, 애니메이션은 물질이 아니죠. 차근차근 뜯어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요.”
정 감독이 최근 관심 기울이는 주제는 ‘세상’과 ‘사람’이다. “‘움직임의 사전’ 이전 작품들에서는 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제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도시 한복판에서 느끼는 공허와 외로움에 관심이 가요.” 정 감독은 최근 서울을 벗어나 경기 과천시로 이사했다. 뜻 맞는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뤄 서로 배우고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작품이 잘 되냐 안 되냐 문제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더 중요한 고민 같아요. 어떻게 사는지가 작품에도 묻어나겠지요.”
칸=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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